ninesun 2008. 5. 29. 16:28

천불산 다탑봉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정말 그때까지만 하여도 석불 석탑이 일천기씩이 실존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우유 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 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道岩面) 대초리(大草里) 천불산(千佛山)에 있는 절.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도선(道詵)이 세웠다는 설과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설 등이 전해지나,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박윤동(朴潤東)·김여수(金汝水)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 좌우의 산등성이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80년 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로는 연화탑과 굴미륵석불, 보물 제796호인 9층석탑, 보물 제 797호인 석조불감, 보물 제798호인 원형다층석탑, 부부 와불(臥佛) 등이 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우리 국토의 지형을 배로 파악한 도선이 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고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잘 알려진 부부와불은 천불천탑 중 마지막 불상으로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의 조각이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한다.  

 

 구층석탑

1984년 11월 30일 보물 제796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10.7m이다. 운주사는 화순군 도암면 천불산(千佛山)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에 딸린 사찰로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도선(道詵:827∼898)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넓은 자연석을 놓아 이를 하층 지대석(地臺石) 겸 기단석(基壇石)으로 삼고, 그 위에 상층기단 받침을 3단으로 새긴 다음, 상층기단 겸 탑신(塔身)을 올려놓아 9층까지 이루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돌은 4장의 널돌로 짜였고,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긴 뒤 다시 면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굵게 새겨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초층의 탑신을 제외한 각 층 탑신 4면에는 이중으로 마름모 모양을 양각하여 그 안에 십자형 꽃무늬를 조각하고 옥개석(屋蓋石) 밑면 역시 사선문양을 양각하였다. 상륜에는 옥개형 석재를 올려놓았고, 그 위로는 보주(寶珠)를 생략하였다.

거대한 암반 위에 세워진 이 탑의 꼭대기에는 원기둥모양으로 다듬은 돌과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옥개석의 밑면에 받침을 생략하였거나 각 면에 새긴 조각의 특징 등 탑의 조성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석조불감

1984년 11월 30일 보물 제79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5.3m, 재료는 화강석이다.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가리킨다. 운주사의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龕室)이다. 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감실 안에는 남쪽과 북쪽을 향하고 있는 여래좌상이 있다.

불감은 맨 밑에 4각의 평판석(平板石)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위로 4각 돌기둥을 세워 석실을 조성하여 이를 받치게 하였으며, 그 위에 팔작(八作)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었고, 석실 전면과 후면에 각각 불상을 안치하였다. 원래는 석실 전후에 석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던 모양이나, 지금은 석문을 달았던 흔적만 남아 있다.

남쪽의 불상은 전체높이 255㎝로 소발의 머리에 길고 예리한 코, 작은 입과 목에 삼도(三道)가 표현되었고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通肩)이며 도식적인 옷주름을 간략히 표현하였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배에 대고 왼손을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인데, 입체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전체높이 264㎝인 북쪽의 불상도 같은 양식을 보이는데 옷 속에 싸인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화되고 경직된 불상 양식과 도식적인 옷주름 표현 등 불상을 새긴 수법은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나타낸다.

 원형다층석탑

1984년 11월 30일 보물 제79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5.71m이다.

둥근 이중 기단(基壇) 위에 높직한 10각의 돌을 짜올리고 그 위로 앙련화(仰蓮花: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를 상징한 원형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었다. 그 위에는 짤막한 원형의 탑신(塔身)에 원형 옥개석을 차례로 얹어 6층탑을 이루었는데, 원형은 층수가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각 층의 원형 옥개석은 상층부로 올라감에 따라 완만하게 체감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옥개석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선이 돌려져 있다. 상륜(相輪)에 보륜(寶輪)·보주(寶珠)가 전혀 없는, 버섯모양의 석탑으로 고려의 특색이 있는 희귀한 탑이다.

기단의 맨윗돌은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해, 탑신의 옥개석은 반대로 아랫면이 편평하고 윗면이 둥근 모양으로 아래위의 조화와 안정감을 이룬다. 이 석탑은 그 형식이 매우 특이한데 제작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운주사 서쪽 산능선에는 거대한 두 분의 와불(미완성석불)님이 누워있다. 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천번째 와불님이 일어나시는 날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말을 전해왔다. 아마도 운주사 천불천탑은 우주법계에 계시는 부처님이 강림하시어 하화중생의 대 설법을 통한 불국정토의 이상세계가 열리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조성한 대불사가 아닐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