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esun 2008. 6. 10. 15:01

임청각(임청각) 보물 제 182호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은 중종 14년(1519)에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이씨 이명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중 하나인 이 집은 독립 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이며, 그의 아들과 손자 삼대에 걸쳐 독립 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용(用)자가 가로 누은 듯한 독특한 평면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뚜렷한 공간을 구분짓고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매우 분명함을 알 수 있다. 별당 형식의 정자 건물인 군자(君子)정(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평면이 ‘정(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이다. 이 정자 내부에는 이 곳을 찾은 시인 묵객들이 아름다운 자연에 취하여 지은 시들이 걸려있다.

 임청각이란 당호는 퇴계 이황의 친필로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따온 것이다. 건물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자연환경과 잘 어울린다.

 

 7층 전탑을 구경할 때 임청각 주위를 지나간 적이 있었다. 상당히 긴 편이라고 여기고 말았었는데

그 안의 규모는 훨씬 방대했다.

 원래는 99칸이라고 전해지나 일본이 독립운동을 하는 이상룡 외의 사람들이 살던 이 곳 앞으로 철도를 냄으로써 약 30칸 정도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철도가 다니게 되면서 99칸이라는 집이 약70칸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되고, 철로의 철가루가 이 집의 지붕에 날아와 기와의 색이 바랜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차가 지나가면 소리가 방음벽을 설치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끄럽게 들린다. 방음벽은 제 역할을 제대로 다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임청각의 경관을 망쳐 놓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방음 벽이 없다면 산자락을 깍아 평지로 만들에 세워진 임청각의 정면에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의 모습이 보여야 하는 데 그렇게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