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2(08.5.6~7)
세연정 사적 제 368호(1992. 1.21 지정)
보길도는 세연정에서 보는 인공정원의 풍경과 동천 석실에서 내려다보는 전망, 어부사시사
의 현장인 예송리 해안에서 보는 바다 풍경들이 대단히 아름다운 빼어난 섬이다. 보길도
이곳 부용동은 조선의 시인 고산 윤선도(1587~1671)선생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살던
유서 깊은곳이다. 병자호란의 국치와 추잡한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부용동의 아름다운
절승에 의탁하여 자기구제와 초속적 자유를 얻었다. 부용동은 고산이 51세때(1637년) 들어
와 85세(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13년간 살면서 7차례나 드나들었고, 어부사시사 40수와
수십편의 한시를 창작하였다. 고산의 부용동 생활은 격자봉 밑에 낙서재와 무민당을 짓고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었다. 곡수당
지역은 초당,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 월하탄이 조성되어 고산이 휴식하던 장소
이다. 곡수당 옆에는 서재가 건립되어 고산의 아들들과 제자들이 살던 곳이다. 동천석실
은 낙서재 건너편 바위산 험한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쳔여평 공간에 석담, 석천, 석폭,
석대 및 희황교와 한칸 짜리 목조건물인 동천석실이있다. 이곳은 고산이 책 읽고 사색하며
신선처럼 소요하던 은자의 처소였다.세연정 지역은 3천여 평의 계원으로 부용동 입구에 있
다. 세연정을 중심으로 조우에 연못 (205여 평)과 계담(600여 평)과 판석재방과 동대,서대,
옥소대, 칠암, 비홍교와 동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아름답다. 윤
선도 선생은 이곳에서 음악을 연주케하고 기녀들로 하여금 동대, 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거
나 동자가 배를 타고 어부사시사를 노래 부르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낚시도 즐기던 곳이
다. 또 고산의 유적으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행사인 유상공수를 행하던
낭음계, 용이 승천하는 승용대, 연정이 있었던 조산과 여름에도 한기를 느낀다는 하한대,
고향을 그리워하며 임금이 계신 궁궐을 바라보던 혁희대, 석전, 미산 등 경승의 산봉우리
마다 고산은 상징적 이름을 붙였다.부용동 유적은 고산의 기발한 착상과 절묘한 자연과의
조화성으로 구성된 한국 최고 최대의 별서조경 유적이다.
회수담(回水潭)
제연정 동쪽 축단 밑에 계담에서 인공연못으로 흘러드는 터널식 수입구(水入口)가 있다. 계담쪽에서 물이 들어가는 수구(水口)는 다섯 구멍이며, 인공 연못쪽으로 나오는 수구는 세 구멍이다. 이를 ‘五入三出’이라 하는데, 이 구조는 아주 독특한데 물막이 석축에 다섯곳의 흡수구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되, 배출하는 구멍은 세곳만 만들어 들어오고 나가는 수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이다.
판석보(板石洑)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石造洑)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보(洑)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혹약암(惑躍岩)
세연지 계담(溪潭)에 있는 칠암(七岩)중의 하나이다. 이 바위는 「易經」의 건(乾)에 나오는 ‘혹약재연(惑躍在淵)’이란 효사(爻辭)에서 따온 말로,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사투암(射投岩)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이라 불렀는데, 그 중 하나인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연목쪽이 들려진 모습이다.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옥소대쪽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비홍교(飛虹橋)
「보길도지」에는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정자 서쪽 제방 동쪽 겨우 한 간쯤의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樓)에 오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다리를 비홍교라 불렀다. 지금은 그 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方壇)이 연결되어 있어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세연정(洗然亭)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이란 뜻으로, 「고산연보(孤山年譜)」에서는 1637년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와 부용동을 발견했을때 지은 정자라 하고 있다.
정자의 중앙에 세연정(洗然亭), 동쪽에 호광루(呼光樓), 서쪽에 동하각(同何閣), 남쪽에 낙기란(樂飢欄)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또 서쪽에는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편액을 따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