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esun 2008. 6. 23. 12:02

운문사

 

 

  의심

의심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의심이란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근본요인이며,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독이며

서로의 생명을 손상시키는 칼날이며

서로의 마음을 괴롭히는 가시이다.

                아함경(阿含經)


 

 

 

 

 

 

 

        형상에 집착하면

누에고치 안에 있는 모양에 집착하면

제한 된 공간 밖에 모르지만, 모양을 버리면

고치 밖에 있는 드넓은 창공을 보게 됩니다.


안에 있는 공간과 드넓은 창공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누에고치의 껍질입니다.

껍질은 모양이며 고정관념에 불과합니다.


깨달음은 껍질에 걸리지 않고 고치 안에

있는 공간과 드넓은 창공이 통하는 것입니다.

       묘원(한국 위빠사나 선원장)

 

 

 

 

  

 

 

 

 

 

 

 

운문사사천왕석주(雲門寺四天王石柱)

보물제318호, 이 사천왕 돌기둥은 현재 작압전(鵲鴨殿)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 좌ㆍ우에 배치되어 있으나, 원래는 이 곳에 세워진 탑신 4면이나 안의 벽면에 모셔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고저를 든 증장천왕(增長天王), 탑을 든 다문천왕(多聞天王), 불꽃을 든 광목천왕(廣目天王), 칼을 든 지국천왕(持國天王)등은 천의(天衣) 자락이 휘날리는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고 선 자세이다.

이들 사천왕상의 높이를 보면 제1 돌기둥은 114cm, 제2 돌기둥은 118cm, 제3 돌기둥은 128cm, 제4 돌기둥은 122cm이다.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는 장대하지만 양감이 줄어든 가냘픈 체구, 부드러운 인상, 갑옷의 굵은 띠주름 등으로 미루어 보아 형식미가 진전되었던 신라 말 후삼국 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한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

보물 제316호, 이 비는 고려 중기의 승려인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의 운문사 중창과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원응국사비이다. 고려 인종(仁宗)22년(1144)12월 9일에 학일 왕사가 93세로 입적하자 인종은 왕사를 국사로 책봉하고 원응이라는 시호를 내려 비를 세우게 하였다. 이 비는 높이 2.3m, 폭0.9m의 편마암으로 된 비교적 큰 규모의 비석이다. 비석머리와 받침돌은 없어졌고 현재는 3편으로 절단되어 있는 비편을 연결하여 하나의 비시으로 구성하였다. 해서체로 비면의 상부에 “원응국사비명”이라 새겨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그의 문도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비문의 작성자는 금강거사(金岡居士) 윤언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