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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군자리1(08.12.13)

ninesun 2008. 12. 17. 22:08

오천 군자리

 이곳은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부터 광산 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가 약 21대에 걸쳐 600년간 세거(世居)해 오던 외내[烏川] 마을이 안동댐으로 인하여 수몰되자 문중의 건물(建物)들을 한곳으로 이건한<군자리>로 오천 문화재단지(文化財團地)라 부르고 있다.

 신라 왕실의 후예(後裔)인 광산 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光山)의 토성(土姓)으로 고려왕조 후기에 중앙으로 진출하여 벼슬길에 오르면서 명문(名門)으로 발전한 왕경(王京)에 기반을 둔 가문이었는데 그 한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오천의 입향조(入鄕祖)는 농수(聾 ) 김효로(金孝盧)이며 그의 아들 연(緣)과 유(綏)는 모두 조선왕조 중종(中宗)때의 명신(名臣)으로 명망이 드높았다. 예안읍지는 기록하여 오천(烏川)은 현의 남쪽 오리에 있다. 마을사람 김부인[호:山南], 김부필[後彫堂], 김부신[養正堂], 김부의[ 淸亭], 김부륜[雪月堂] 등이 모두 퇴계의 문인으로 도의(道義)와 덕행(德行)이 일시에 알려저 한강(寒岡)정구(鄭逑)선생은 이르기를 "외내 한마을은 모두가 군자(君子)다"라고 했는데 그로 인하여 뒷사람들이 '군자마을'이라 불렀다. 또 '七君子 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김부인등 '富'자 항렬 5인은 모두가 종형제 사이다. 거기에 내외종간(內外從間)인 금씨(琴氏)[일휴당(日休堂)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두 분을 포함해서 일컫는 말이다.

 

▣ 입향조(入鄕祖) 김효로(金孝盧, 1455∼1534)

자는 순경(舜卿), 호는 농수(聾 ) 또는 춘포(春圃)이며 회(淮)의 아들이다. 풍산현 도양에 살다가 성종년간에 예안으로 옮겨 정착하므로 광산 김씨 예안파 입향조가 되었다. 퇴계는 그의 <操行卓異>하고 <善慶裕後>한 덕행(德行)을 높이 칭송한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참판에 증직되었고 숙종 임오년에 사림에서 현의 동쪽에 사당을 세워 이계양(李繼陽)[퇴계의 조부]과  김효로(金孝盧)의 위패를 모시고 이름을 향현사(鄕賢祠)라 하였다.


▣ 김연(金緣, 1487∼1544)

자는 자유(子由), 호는 운암(雲巖) 효로(孝盧)의 아들. 어머니는 양성(陽城) 이씨로 군수 지(持)의 딸이다. 15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춘추관을 거쳐 50세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강원도관찰사, 경주부윤을 역임했다. 58세에 경주관아에서 서거하니 문종과 동궁[인조]이 각각 부의(賻儀)를 내렸고 이듬해 3월에 예관(禮官) 채무일(蔡無逸)을 보내어 사제(賜祭)케 했다.

박성(朴惺)[대암(大庵)]이 묘지명(墓誌銘)을 짓고 정범조(丁範祖)[大司諫]가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신도비명(神道碑銘)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지었는데 글씨는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썼다.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광산김씨 오천 입향조()인 김효로(:1445∼1534)와 그의 증손 김해(:1555∼1593)를 제향하는 불천위 사당과 후조당(:경북중요민속자료 227)에 부속된 재사이다.

김효로의 사후 2년 뒤인 1536년(중종 31) 후손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향하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영남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김해를 추가로 배향하고 있다. 원래는 오천리 낙동강변에 있었는데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후조당 아래에 이건된 재사는 모두 3동이다. 2동은 자형 건물로서 앞뒤로 자리잡고 있고, 그 오른쪽에 있는 나머지 1동은 ㄱ자 형태의 부속채이다. 사당은 후조당 옆에 있다.  

 

 

 

 

후조당 [後彫堂]

1991년 8월 22일에 중요민속자료 제227호로 지정되었다. 김준식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김부필(:1516∼1577)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위치는 새 외내 느티나무 광장 서북쪽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언덕 위에 있다.
 김부필의 본관은 광산이고, 자는 언우(), 호는 후조당이다. 운암() 김연()의 아들로, 퇴계(退)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성리학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나, 정계에는 뜻이 없어 관직을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순조 때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문순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집 4책이 남아 있다.
 후조당은 임진왜란 전에 창건되었으며, 그뒤 여러 차례 중창되었다. 2중 대들보에 5량의 집으로, 큰 대들보 위에 다시 종량()이 있고 솟을 대공이 그것을 받친 양식이다. 집의 모양은 ‘ㄱ’자로 꺾여 있으며 세로 2칸, 길이 4칸이다. 방 2개와 6칸으로 된 큰 대청으로 되어 있다. 후조당 현판은 스승인 이황의 친필이다.

 

 

 

 

 

 퇴계의 친필

 

읍청정은 조선중기의 학지인 김부의 선생의 호이자 선생의 정자이름이다. 편액은 스승인 퇴계 선생이 명명한 것인데, "읍청정"이란 청량산을 바라보며 마음의 띠끌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또, 이 건물은 구 오천의 안산 기슭에 있을 때 청량산을 향해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청량산을 향해 읍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읍청정"이라 불렀다. 읍청정을 중심으로 약 5m 뒤에는 광산 김씨 문중의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 과 유물전시관인 숭원각이 자리잡고 있다. 읍청정과 장판각, 숭원각이 들어 선 터는 원래 논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 장자 주위에 물이 많이 생기는데, 이 물을 모으기 위해 읍청정의 3-4m 전방에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은 우리 나라 지도형상으로 조성하였는데, 중앙에 측백나무를 심어 삼팔선을 만들었다. 이곳에 모인 물은 관을 통하여 아래쪽 재사 옆에 만든 연못으로 다시 모이게 된다. 이 정자는 1m 50cm 정도의 기단 위에 조성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겹 처마 팔작기와지붕집이다. 공간 구성은 정자 마루 2칸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1칸 크기와 1칸 반 크기의 온돌방을 꾸 몄으며, 좌측 방과 마루앞에는 툇마루 3칸을 놓았다. 정자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을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마루의 전면에는 들어 열개 띠살 4분합 문을 달아 필요시에 들어 올려 2개의 들쇠로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루의 뒷벽과 방과 접한 벽면에는 쌍여닫이 넌출문과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전면과 측면에는 툇마루와 쪽마루로 구성하였다. 건물 전면 의 툇마루와 쪽마루는 청판에 풍혈이 있는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이 정자는 이건 시 구재(舊材)의 훼손으로 후손인 기영(金基泳)씨가 공사비를 부담하여 옛 양식대로 신축한 것이다. 정자에는 퇴계 선생이 친필로 쓴 편액과 함께 퇴계 선생이 지은「김신중읍청정십이영(金愼仲推淸亭十二詠詩)」이라는 시판이 걸려있다.

 

 

 

영남지방의 정자 가운데 가장 우아하고 낭만적인 정자로는 단연 탁청정 (濯淸亭.중요민속자료 제226호)이 그 첫 자리에 꼽힌다. 광산 김씨 예안파 입향조인 김효로(1455~1534) 의 둘째아들 김수(金綏.1491~1552)가 자신의 호를 따 지은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인 이 정자는 방(2칸)과 대청마루(4칸)로 나눠있다. 대청마루 아래는 축대를 낮춰 높은 주초(柱礎)를 다듬고 그 위에 누하주를 놓아 정자의 위용을 돋보이게 하는 한편, 누마루 둘레에는 계자(鷄子)난 간을 둘러 평(平)난간을 두른 온돌방과 달리 꾸몄다.   

다른 정자에 비해 제법 굵은 두리기둥은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가운데를 약간 볼록하게 한 배흘림기둥 흔적이 엿보인다. 온돌방의 문짝은 모두들 어울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큰 문짝 내에 작은 문을 만들어 평상 시에는 작은 문을 이용하도록 꾸며져 있어 재미를 준다.

누마루에는 석봉 한호가 쓴 탁청정 현판과 퇴계 이황, 농암 이현보등 명유(名儒)의 시를 새긴 작은 현판도 걸려 있어 정자의 품위를 더해준다. 30~ 40명이 너끈히 둘러앉을 수 있을 만큼 널찍한 누마루는 방과 직교한 한쪽을 널판과 널문으로 가로막아 두쪽면 만 조망이 가능하도록 트여있다.

특히 굵은 목재를 사용한 들보와 기둥머리를 장식한 쇠서는 견실하면서 도 미려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겹 처마 팔작지붕으로 처마 곡선은 눈에 보 일듯 말듯 완만한 곡선으로 마무리,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낭만적 분위기를 풍기게 한다. 정자 앞에는 연못을 갖춰 운치를 더했다.

생원시에 합격한 탁청정 김수는 활 쏘기에도 능했으며 관직에 나가있는 형 연(緣.1487~1544)을 대신해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며 지냈다고 한다. 그 는 성품이 호탕하고 사람을 좋아해 이곳 탁청정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다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