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09.2.26)
공주공산성(公州公山城)
사적 제12호 공주시 금성동
이곳은 백제 문주왕 때에 옮겨온 도읍지이다. 백제 시대에 흙으로 쌓은 土城이었으나, 조선시대에 石城으로 고쳐 쌓았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미터의 능선에 쌓은 이 성은 동서 약 800m, 남북 약 400m 정도의 크기이고 총둘레는 2,600m 가량 된다. 현재 성벽의 높이는 약 2.5m, 너비는 약3m 이다.
당시에 “구마나리” 또는 “곰나루”로 불리던 웅진은 삼근왕ㆍ동성왕ㆍ무령왕을 이어 538년(성왕16년)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수도였다. 처음 이 성의 이름은 웅진성(熊津城)이었으나 고려시대 초엽에 공산성으로 바뀌었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는 雙樹山城으로 불리었다.
성 안의 유적으로는 雙樹亭, 雙樹山城事蹟碑, 鎭南樓, 臨流閣址, 光復樓, 明國三將碑, 靈隱寺, 연못, 拱北樓, 동ㆍ서문 등이 있다.
공산성 금서루(公山城 錦西樓)
금서루(錦西樓)는 공산성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설치한 문루였으나 성안에 도로를 개설하면서 오래 전에 파괴되어 터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에 문헌의 기록과 동문의 유구를 조사한 결과 및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철종(哲宗) 10년(1859)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문루의 규모는 동문과 같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건물이었다고 한다.
공북루(拱北樓)
유형문화재 제37호
1603년(선조36년)에 건축한 공산성의 북문이다. 이 곳은 원래 망북루(望北樓)가 있던 터였으나 금강에서 성 안으로 들어오는 문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아래는 성으로 통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위는 마루로 만들어 네 면을 개방하여 강가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건물 안에 중수기(重修記)와 시서(詩書) 등이 걸려 있어 풍취를 더해 주고 있다.
공산성 연지(公山城 蓮池)
기념물 제42호
이곳은 공산성 북쪽의 금강과 영은사 사이에 있는 연못이다. 공산성에는 우물이 3개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곳과 쌍수정 남쪽의 것 2개만 확인되고 있다. 발굴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었으나 1982년부터 1983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확인ㆍ정비한 것이다.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았으며,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 시설을 하였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만하루(挽河樓)
만하루(挽河樓)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과 景勝을 관람하는 누각 건물로 조선후기 영조시대(1724~1776)에 건립되었다. 그간 홍수로 붕괴 매몰되었던 것을 1982년 건물터를 발견하면서 1984년 정면 3칸, 측면2칸의 목조건물로 중건하였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과 주위의 기단석 디딤돌 등은 원형대로 이용하고 건물은 그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영은사(靈隱寺)
전통사찰 제2호
영은사(靈隱寺)는 『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조선 세조 4년(1458)에 지은 사찰이며, 광해군 8년(1616)에는 이곳에 승장(僧將)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圓通殿)과 강당인 관일루(觀日樓)가 있다. 금당인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익공계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1933년 12월에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일루는 주심포 계통의 팔작지붕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이 곳에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었음을 짐작케하는데,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유형문화재 제36호
이 비는 정유재란(1597)때 충주에 주둔하면서 왜적의 위협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을 평안하게 하였던 명나라 장수 이공(李公), 임제(林濟), 남방위(藍芳威)의 사은 송덕비이다. 그들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1599년(선조 32년)에 금강 변에 비석을 세웠는데, 홍수로 비석이 매몰되어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자 1713년(숙종 39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일제 침략기에 일인들이 왜구(倭寇) 등의 글자를 지워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었던 것을 1945년에 발굴하여 현재 위치로 옮겼다.
임류각(臨流閣)
임류각(臨流閣)은 서기 500년(백제 동성왕 22년)에 왕궁 동쪽에 지은 건물로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1980년 공산성 발굴 조사로 임류각터를 발견하고 1993년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 및 현실의 벽돌에 있는 무늬를 많이 활용하였다.
공산성 장대지(公山城 將臺址)
이 곳은 조선시대 장대가 있었던 터이다. 장대는 성안에서 군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만든 건물이다. 1980년 발굴 조사 때에 건물의 기둥을 놓았던 주춧돌 자리가 확인되었다. 공산성 안에 있었던 군사시설 중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공산성 광복루(公山城 光復樓)
문화재자료 제50호
원래 공산성 내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中軍營의 문루이다. 일제 침략기 초에 일제가 공산성의 북쪽 문인 공북루 옆에 있는 문루를 이 곳으로 옮기고 웅심각(雄心閣) 또는 해상루(海桑樓)라 하였다. 1946년 4월에 金九 선생과 李始榮 선생이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음을 기리고자 광복이라 하여 광복루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산성 동문지(公山城 東門址)
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의 밑 부분 구조를 확인하였다. 문터 옆 양쪽에서 원래의 문을 지탱하는 돌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와 철종 10년(1859)에 편찬된 「공산지」의 2층 3칸 건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동문의 누각을 복원하였다.
쌍수정 사적비(雙樹亭 事蹟碑)
유형문화재 제35호
이 비는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1624)을 피하여 이 곳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새긴 것으로 1708년(숙종34년)에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에는 이괄의 반란과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을 쓰고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간의 일도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지은 것이며, 글씨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쓴 것이다. 비의 총 높이는 365cm이다.
공산성 연못(公山城 蓮池)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초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터 연못이다.
공산성은 1985년 8월부터 1986년 12월까지 3회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왕궁건물터, 나무로 만든 저장시설, 저장구덩이 등과 같은 유구와 백제와당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연못은 본 건물의 정면에 지면을 깊게 파고 자연석을 쌓아 원형으로 만들었고 규모는 깊이가 3m, 지표면 지름이 7.30m, 바닥 지름이 4.78m에 이른다. 특히 연못의 호안석 뒷부분에는 물이 밖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1m 너비의 점토를 다짐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추정 왕궁지(推定 王宮址)
이곳은 백제가 한성세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된다.
1930년대에 쌍수정 광장으로 불리던 넒이 약 1,600평방미터를 운동장으로 만들 때에 건물의 주춧돌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1985~1986년에 걸친 발굴 조사 때 10칸ㆍ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및 목곽의 저장 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부 건물터에서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우는 방식인 굴건식 유구가 확인되어 백제가 수도를 옮기기 전에도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성 쌍수정(公山城 雙樹亭)
문화재자료 제49호
1734년(영조10년)에 관찰사 이수항(李壽沆)이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왕이 공산성에 멈물렀을 때 두 그루의 나무 밑에서 반란의 진압 소식을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진압되자 왕은 쌍수에 正三品 通訓大夫를 명하고, 성을 쌍수성이라 부르도록 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영조 때에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