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민속마을2(09.4.5)
양동 근암 고택(良洞 謹庵 古宅)
중요민속자료 제76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14-1
이 가옥은 조선 정조(正朝) 4년(1780)경 이정수(李鼎壽)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한다. 이희구(李熙久)가 홍릉참봉(弘陵參奉)을 지냈으므로 참봉댁이라고도 불리운다.
전체 모양은 일반적인 ‘ㅁ’자 또는 앞이 튼 ‘ ㅁ ’자 모양을 따르지 않고, 대문채 뒷편으로 ‘ ㄱ ’자 모양 안채가, 그 오른쪽에 거리를 두고 사랑채가 놓여 있다. 이렇게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 떼어서 배치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각 건물의 규모나 안채, 사랑채에 둥근 기둥을 전혀 쓰지 않았다는 점은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안채의 북쪽에 사당을 두었는데, 앞면은 3칸이고 옆면은 1칸으로 홑처마 맞배집이다.
양동 상춘헌 고택(良洞 賞春軒 古宅)
중요민속자료 제75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16
이 가옥은 조선 영조(영조) 6년(1730)경에 세웠다고 전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앞이 튼 ‘ ㅁ ’자 모양으로 배치 하였고 앞에 1자 모양의 행랑채가 있어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몸채의 가운데에 2칸 안대청과 1칸 건넌방이 있고 안대청의 왼쪽으로 반칸 찬방, 1칸 반 안방, 2칸 부엌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건넌방과 부엌을 배치하는 것은 서울지방 일반 서민의 주택 구조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안대청과 사랑대청의 가운데 기둥을 둥근 기둥으로 쓴 점은 큰집들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다. 사랑마당 북쪽 높은 곳에 사당이 있다. 이 북쪽 돌 축대에 3단으로 꽃 계단을 조성하고 꽃나무를 심어 사랑채와 잘 조화되고 있으며, 이는 사랑 뒷마당이 의도적으로 조성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양동 낙선당(良東 樂善堂)
중요민속자료 제73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25
이 건물은 조선 중종(中宗) 35년(1540)에 입향조 손소의 셋째 아들 손숙돈(孫叔暾)이 살림날 때 순절한 손종로(孫宗老, 1598~1636)의 후손이 살고 있는 집으로 사랑채에 낙선당이란 당호가 있다.
건물구조는 안채ㆍ대문채ㆍ사랑채 등이 ‘ㅁ’형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채는 앞면 3칸, 옆면 1칸 크기로 ‘ㅡ’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앞면 5칸, 옆면 1칸반 크기로 대청과 사랑방을 두었는데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인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들에 비하여 안채와 사랑채 모두가 나지막한 기단 위에 세워진 것이 특이하다.
창은정사(蒼隱精舍)
조선 철종 11년에 창은 이남상(蒼隱 李南祥)공이 건립한 주택으로 'ㅁ'자 형태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공의 아들인 내곡 이재교(內谷 李在嶠)공은 영남유림을 대표하여 대원군(大院君)에게 국정의 개혁을 바라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반집으로는 드물게도 정자(내곡정)을 가지고 있다.
양동 수졸당(良洞 守拙堂)
중요민속자료 제78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212
이 가옥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4째 손자인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이 조선 광해군(光海君) 8년(1616)에 세운 것이다. 그의 호를 따서 수졸당이라고 하였으며, 사랑채는 영조(英祖) 20년(1744)에 6대손인 대사헌(大司憲) 양한당(養閒堂) 이정규(李鼎揆)가 세운 것이다.
앞쪽에 사랑채와 대문채가 일자로 놓여 있고 그 뒤편에 안채와 아래채가 있어 전체가 앞을 튼 ‘ㅁ’자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는 앞면이 4칸이고 옆면은 2칸이다. 안채는 ‘ㄱ’자 모양으로 사랑채 뒤쪽에서부터 건넌방ㆍ안대청ㆍ안방을 놓고 아래채 쪽으로 꺾인 건물에 부엌ㆍ광ㆍ찬창고ㆍ창고를 배치하였다.
사랑채와 떼어서, 사랑채보다 지붕을 낮추어 대문간채를 세운 것은 두 건물의 격에 차이를 둔 특이한 것이다. 사당은 안채 뒤쪽 언덕 위에 동쪽을 향하여 있으며 따로 담장을 쌓아 지었다.
양동 대성헌(良洞 對聖軒)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183
이 건물은 조선 영조(英祖) 8년(1732)에 물와(勿窩) 이재직(李在直)의 셋째아들 이능단(李能亶)이 분가할 때 지었다. 대성헌이란 성주봉(聖主峰)을 마주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안채는 ‘ㄱ’자 모양이고, 사랑채와 행랑채는 ‘ㅡ’자 모양으로 이들 세 건물이 모여서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본채 6칸과 옆채 3칸으로 꺾이는 곳에 긴 부엌을 두고 오른쪽에 안방과 대청을 두었다. 사랑채는 앞면 4칸에 옆면 1칸 반으로, 대성헌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대청이 2칸이다. 나머지 2칸이 사랑방이고 앞에 반칸 폭의 툇마루를 달았다. 행랑채는 앞면 5칸에 옆면 1칸으로 대문과 방, 가축을 기르는 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건물은 모두 소박하고 간결하여 막돌로 쌓은 기단위에 막돌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네모 기둥을 세웠다. 모두 홑처마 맞배집으로 사랑채의 대청 앞쪽은 2칸에 8짝 문을 샛기둥 없이 달고 4짝씩 접어들어 올리게 하였다.
손종로 정충비각(孫宗老 旌忠碑閣)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84
이 비각은 조선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 때 순절(殉節)한 낙선당(樂善堂) 손종로(孫宗老, 1598~1636)와 충실한 노(奴) 억부(億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正祖) 7년(1783)에 임금의 명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정충비각은 앞면과 옆면이 각 1칸으로 팔작(八作)지붕이어서 가구방법이 특이하다. 옆에 있는 노(奴)의 비를 세운 충노각(忠奴閣)은 정충각(旌忠閣)보다 건물이 못한 편이다.
樂善堂은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현손으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 무과에 합격하여 남포현감(藍浦縣監)을 거쳤다. 병자호란 때 경기도 이천(利川)의 쌍령(雙嶺)전투에서 따라온 노(奴) 억부와 함께 전사하였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고 옷가지만으로 장례를 지냈다. 비의 글은 우승지(右承旨) 이정규(李鼎揆)가 짓고 글씨는 정충필(鄭忠弼)이 썼다.
양동 이향정(良洞 二香亭)
중요민속자료 제79호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89
이 가옥은 조선 숙종(肅宗) 21년(1695)경에 세워졌다. 이향정(二香亭)이라는 이름은 온양 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李範中)의 호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ㄱ’자 모양의 안채, ‘ㅡ’자 모양의 사랑채와 아래채가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꺾인 곳에 부엌을 두고 왼쪽으로 고방 2칸과 아랫방 1칸을, 앞쪽으로는 안방 2칸 안대청 2칸과 건넌방 1칸을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큰방 뒤로 부엌과 툇마루가 있는 서실(書室)을 꾸며 기능상의 변화를 주고 있다. 건넌방의 앞면과 옆면의 마루는 넓게 확장하여 난간을 돌리고 있어 누마루의 정취를 보이고 있다.
사랑채 오른쪽 끝에 중문(中門)을 내어 안채로 드나들게 하고, 튼 ‘ㅁ’자를 이룬 건물들 사이공간에는 담을 쌓아 은폐된 안채 공간을 만들고 있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사랑채를 대각(對角)으로 배치한 점은 중부지방의 큰집들이 지니는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