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esun 2009. 5. 9. 12:18

용문사(龍門寺)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新羅 신덕왕(神德王) 2년(913) 대경大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敬順王(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한다.

  高麗 禑王 4년(1378) 智泉大師가 개풍 敬天寺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朝鮮 太祖 4년(13950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 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들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 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 선걸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 일주문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권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 및 비와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가 있다.

용문사 입구의 용문산 관광지를 잘 조성해 놓았다. 

 

 

 

 

 

 

용문사 정지국사 부도 및 비

       보물 제531호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99-1 용문사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이다. 정지국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에서 수학하였다. 조선 태조 4년에 입적하였는데 찬연한 사리가 많이 나와 태조가 이를 듣고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부도와 비는 80m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하고 있다. 부도는 조안(祖眼) 등이 세운 것이며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이 4각이고 윗받침돌과 탑몸이 8각으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모습이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기고, 북 모양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장식없이 부드러운 곡선만 보인다. 탑몸에는 한쪽 면에만 형식적인 문짝 모양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아래에 3단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모서리마다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돌 윗면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의 지붕선이 있고, 끝부분에는 꽃장식이 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된 것이다.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비는 작은 규모의 석비로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듯이 깎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진 주위에는 가는 선이 그어져 있다. 비문은 당시의 유명한 학자인 권근(權近)이 지었다. 처음에는 정지국사부도에서 20m 아래 자연석 바위에 세워 놓았는데, 빠져 나와 경내에 뒹굴고 있던 것을 1970년경 지금의 위치에 세웠다.(문화재청)

[이 부도는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下臺石)이 방형(方形)이고 중대석(中臺石)이 원형(圓形)이며 그 위가 8각형(八角形)의 평면이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기본형을 따른 것이다. 석비(石碑)는 장방형(長方形) 대석(臺石) 위에 개석(蓋石) 없이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상단 좌·우를 귀접이하였다. 이 부도는 미지산(彌智山)(현 용문산(龍文山))에 조안(祖眼) 등이 세운 것이며, 비는 태조(太祖) 7년(1398) 당시 학자이며 명신(名臣)이었던 권근(權近)의 글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정지국사(正智國師)(1324∼1395)는 고려말(高麗末)의 고승(高僧)으로 호(號)는 축원(竺源), 속명(俗名)은 김지천(金智泉)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11년(1324) 황해도(黃海道) 재령(載寧)에서 태어나 19세에 장수산(長壽山) 현암사(懸巖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2년(1353) 30세에 자초(自超)(무학대사(無學大師))와 함께 중국(中國) 연경(燕京)에 들어가 법원사의 지공(指空)을 찾아보고 그에게 법을 이어받은 혜근(惠勤)(나옹선사(懶翁禪師))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 뒤 함께 각지로 다니며 수도(修道)하다가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귀국하였다. 벼슬이 싫어 몸을 숨기고 수행에만 힘쓰다가 천마산(天磨山) 적멸암(寂滅庵)에서 입적(入寂)하였는데 화장(火葬) 후 많은 사리(舍利)가 나왔다. 정지국사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정지이다.]   

 

 

용문사 은행나무(수령 1100년, 높이 41m, 둘레 11m)

             천연기념물 제30호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산626-1

  용문사의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많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를 내려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나무는 오랜 세월 전란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 남았던 나무라 하여 천왕목(天王木)이라고도 불렀으며, 조선 세종 때에는 정3품 이상의 벼슬인 당상직첩(堂上職牒)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 정미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웠으나 이 나무만은 화를 면했으며, 옛날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고자 톱을 대는 순간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쳤다고 한다. 또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 나무가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알렸으며, 조선 고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떨어졌다고 한다.

 

 

 

 

 

 대웅전

 삼층석탑 

 지장전

관음전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관음전에 모셔진 이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전형적인 고려 후기의 조각 양식을 계승한 15게기 초의 우수한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당당하면서도 화려한 귀족적인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관음보살은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로 손에 보병이나 연꽃을 들며 머리에는 아미타불이 새겨진 보관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높이가 73cm인 이 보살상은 자비로운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높게 묶은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계율을 지키고 열심히 수행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 극락 세계를 의미하는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고, 참선할 때의 자세인 길상좌로 앉아 있다. 왼쪽 가슴께에는 아래내의를 고정시킨 삼각형 고리가 배 위쪽에는 치마를 묶은 매듭이 있다.

  이처럼 신체에 자연스럽게 걸쳐진 옷(法衣)은 발목 부분에서 부드럽게 주름지며 양 무릎을 덮었고 그 위에는 영락이 장식되었다. 이 보살좌상은 전형적인 고려 후기의 보살상의 양식적 특징인 높게 묶은 머리, 가슴 및 무릎의 영락장식, 왼쪽 가슴의 삼각형 고리를 갖추고 있어 장육사 건칠보좌상(1395년, 보물 제933호)이나 파계사 목조 관음보살좌상(1447년 이전, 보물 제992호) 등과 더불어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조각양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웅전 문살 조각

 

 

 

 

삼성각 

 

 

 

 용문사 일주문의 네마리 용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