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재(09.5.30)
박달재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 ; 1172~1234) 장군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고려의 명장이다. 본관은 언양이며 아버지는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이다. 1186년 음서(陰敍)로 등용된 후 동궁위를 거쳐 장군(將軍;정4품)으로 동북 국경을 지킨 뒤 대장군(종3품)에 올랐다.
1216년(고종 3년) 거란의 무리들이 세운 대요수국(대요수국)의 일부가 몽고군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입하였을 때,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과 개평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어 승리의 기세를 몰아 묵장 들판에서 포진하고 있는 거란군의 진영을 선봉에 서서 돌진하여 갈라놓고 적병을 쓰러뜨렸다. 한 명의 고려 병사가 백 명의 적병과 싸워야하는 상황에서 큰 아들마저 전사하였지만, 탁월한 지휘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향산 전투에서는 적 2,400여 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1217년 거란군 10만 명이 원주를 거쳐 충주까지 내려오자 전군병마사가 되어 제천 박달령에서 거란군을 명주쪽으로 패주시켰다. 1218년 거란이 또 다시 대거 침입하여 강동성으로 들어가자 병마사로서 몽고군과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하였다. 1219년 의주에서 일어난 한순ㆍ다지의 반란을 평정하여 고려를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230년에는 국정 실무를 총괄하는 시중에 올랐다.
김취려(金就礪)장군의 제천 박달령 전투
포천에서 원주를 함락한 거란 10만 대군은 충주와 제천을 침공하려고 하였다. 김취려 장군은 전군병마사로서 맥곡(麥谷) 보리실(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서 중군병마사 최원세(崔元世)장군과 협공하여 적 3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김취려 장군은 제천 방향으로 달아나는 적을 계속 추격하고 산골짜기를 수색하면서 승리의 고삐를 놓치지 않고 박달현에 이르렀다.
1217년 7월 김취려 장군은 거란군과의 전투를 예상하고 박달고개를 먼저 차지하였다. 박달고개는 경사가 가팔라서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병력면에서 불리했던 김취려 장군은 대규모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박달재를 미리 차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김취려 장군은 신덕위(申德威)ㆍ이극인(李克仁)장군을 진중의 왼쪽에, 최준문(崔俊文), 주공예(周公裔)장군을 진중의 오른쪽에 배치하여 거란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자신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고개위로 올라가 진을 쳤다.
동틀 무렵에 예측대로 거란군이 박달고개의 좌우 방향으로 올라왔다. 고개마루에서 미리 포진하고 있던 김취려 장군은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북을 울리면서 공격명령을 내렸다. 잠복하고 있었던 고려의 병사들은 유리한 고지에서 적들을 향하여 일제히 화살을 쏘고 결사적으로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대패한 거란군은 평창을 거쳐 대관령으 넘어 강릉에서 원산, 흥남을 거쳐 여진 땅으로 도주하였다. 박달령 전투의 승리로 전쟁의 피해가 제천이남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애국지사 이용태ㆍ이용준선생 형제동상 및 추모비
제천춠힌 애국지사로 대종교 간부활동 등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기여하신 단암 이용태선생과 중국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 조선민족혁명당 가담 등 독립운동을 하신 여산 이용준선생의 공훈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2006년 9월 1일 박달재수련원에서 두분의 동상 및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단암 이용태지사는 1890년 충주시 산척면 광동리에서 출생하여 봉양면장과 백운면장을 역임하고 1939년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본사에서 활동을 하시다 1942년 대종교가 독립운동 정치단체로 지목되어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여 귀국한 후 1964년 8월에 별세하셨고, 여산 이용준지사는 1907년 봉양면 원박리에서 출생하여 1927년 신간회에 가입 배일운동을 하다 상해로 망명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 결사대원으로 1932년 천진폭탄 의거에 가담하였고 1933년 3월 육삼정에서 일제의 주중공사 암살계획을 추진 중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경성으로 압송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대한보국군단 제1사단 사령관으로 활동하던 중 1946년 1월 공산당 피격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두 형제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