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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09.11.7)

ninesun 2009. 11. 7. 17:06

소수서원

 

 

 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 幢竿支柱)

                보물 제59호

  당간지주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절에서는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았다. 당간지주는 당을 매달던 깃대, 즉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돌기둥이다. 유교의 성지인 소수서원에서 불교유적이 만나는 것이 이채로운데,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인근 부석사 못지않게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 역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절터에 세워진 서원임을 알려주고 있다. 

 

 

 취한대는 자연을 벗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퇴계 이황이 터를 닦고 취한대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 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광풍정(光風亭)ㆍ광풍대(光風臺)

  이 정자 인근에 광풍대가 있고, 광풍대는 퇴계 이황선생이 명명하였다.

  광풍정은 4각 정자로 2002년에 세웠으며, 앞에는 죽계(竹溪)가 감아 돌고 뒤로는 연화산(蓮花山)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광풍대는 송사(宋史) 주돈이전(周敦頤전)에 나오는 제월광풍(霽月光風)에서 따온 말로 인근에는 제월교(霽月橋)가 있다. 

 소수박물관

 가흥리 바위그림

가흥리 바위그림은 소백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남원천과 죽계천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서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는 거친 화강암으로 위ㆍ아래 두 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림은 바위의 윗부분에 새겨져 있다. 3~5개의 횡선으로 연결시킨 기본형이 같은 그림을 새겼는데, 좌우의 선이 많이 휘어 있어 그림과 그림 사이가 마치 원형을 연결시킨 듯이 보인다.이러한 도형은 고령 양전리 암각화와 유사하다. 

  순흥 읍내리 벽화 고분

  순흥 읍내리 벽화 고분은 외형은 둥글고 내부는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굴식돌방무덤이다. 널방의 동편에는 주검받침이 자리하고, 서북편 모서리에는 부장품을 두었던 곳으로 보이는 별도으 방형 대가 마련되어 있다. 벽화는 널방의 네 벽면과 널길의 동서벽, 그리고 주검받침의 서측 면에 그려져 있다. 인물상, 물고기, 뱀 등의 동물계, 연화, 버드나무 등의 식물계, 산악, 구름 등의 무생물계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그려져 있다.

 

 

죽계 

광풍대 

 

 사료관

 

충효교육관 

 영정각

 일영대

 전사청

 장서각

 

 직방재

문성공묘 

 

 학구재

 지락재

 

 

 

 

 

 

 

 경자 바위

  이 바위는 경렴정(景濂亭) 옆 죽계 건너편에 있는 일명 “경자바위”로써 취한대(翠寒臺) 인근 암벽에 새겨진 백운동(白雲洞) 글씨는 퇴계 이황 선생의 각자이고 경(敬)자 글씨는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의 각자인데,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밤마다 귀신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주신재 선생이 敬자에 붉은 칠을 한뒤, 위혼제(慰魂祭)를 드리니 그때부터 원혼들의 울음이 그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고을은 세조(世祖) 3년(1457) 단종복위(端宗復位) 실패로 인하여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입게 되자, 많은 의사들의 시신이 이곳에 수장되었다고 하며, 그 핏물이 7km가량 흘러가 멎은 곳을 지금도 “피끝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한때는 남순북송(南順北松)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폐부된지 228년 만인 숙종 9년(1683)에 가서 “의거의 요람지”로 명예회복을 받게 된 절의지향(節義之鄕)이기도 하다.

  바위 뒤편 언덕에는 퇴계 이황선생이 지은 취한대와 손수 심은 여덟그루의 백송 가운데 지금은 고사목 두 그루만 남아 있다.

 

 경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있다. 경자 위에 백운동은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