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실륵사(09.12.13)
여주 실륵사를 겨울에 다시 방문하였다. 포근한 날씨가 더욱 좋았다. 그러나 공사중인 건물로 인해 조금은 실망은 했지만 그런데로 아름다운 사찰이다.
삼층석탑(神勒寺 三層石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다층전탑 인근의 강변 암반에 건립되어 있는 단층기단을 구비한 평면방형의 3층 석탑이다. 넓은 1매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의 외곽에는 높은 1단의 각형 받침을 마련한 후 중앙에 호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해 기단을 놓았다. 기단은 1매의 석재로 조성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다. 갑석 역시 1매의 석재로 놓았는데, 각 면 3구씩 그리고 모서리에 1구씩 모두 복엽 16판의 복련을 조식했다. 중앙에는 낮고 높은 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해 탑신부를 놓았다.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장각기비(神勒寺 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대장각기비는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 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비신의 높이는 133㎝, 폭은 88㎝로 비신 둘레에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이러한 수법은 고려 말 새로 유행된 석비형식으로 보제존자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질의 대리석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율론 3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다 한다. 서쪽이라면 지금의 명부전쪽이 되리라 추정된다.
현재 이 비는 신륵사의 동쪽 언덕위에 위치해 있다. 비신은 좌단이 깨어져 몹시 손상되어 글자를 알 수 없고 따라서 이 비를 세운 연대를 밝힌 부분에도 손상이 있어 이를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383년(우왕 9, 홍무 16)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다층석탑(神勒寺 多層石塔, 보물 제225호)
극락보전 앞에 건립되어 있는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평면 방형의 석탑이다. 따라서 외형적인 면에서는 신라시대 이래 확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층수가 불분명한 관계로 다층 석탑이라 불리고 있다. 한편, 현존하는 석탑의 절대다수가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백대리석(白大理石)을 주성재료로 사용한 점이 기존의 석탑과 다르다.
신륵사 조사당(神勒寺 祖師堂) 보물 제180호
신륵사의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이 건물은 조선 예종 때 중수된 기록으로 보아 이 즈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불단 후벽 중앙에 나옹(懶翁), 그 좌우에 지공(指空) 및 무학(無學)대사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다.
남향한 낮은 석단(石壇) 위에 세워져 있는 단층의 작은 당우(堂宇) 조사당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이 벽으로 마감하였는데, 측면의 한칸만은 외짝의 정자살문을 달아 따로 출입구를 만들어놓았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비례를 1.07:1로 구성하여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건물내부에 기둥 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대들보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장대석을 한벌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주초는 다듬은 초석으로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을 놓았으며, 공포의 짜임은 외2출목, 내2출목으로 살미첨차는 초제공이나 2제공 모두에서 끝이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교두형(翹頭形 : 圓弧形으로 깎아낸 모양)으로 되어 있어, 조선 초기의 다포식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면과 후면 기둥 사이에 간포 네 개씩 걸쳤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정면에는 여섯짝의 띠살창호를 달았다.
팔각원당형석조부도
경내의 서쪽 언덕에 2기의 부도가 있다. 본래는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다고 하는데, 1966년 11월 17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지닌 석조부도이다.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평면 팔각의 기단부·탑신부·상륜부를 차례로 중첩하였다. 지대석의 하대석은 일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대석에는 8판 복엽의 복련(覆蓮)을 조식했다. 중대석은 낮은 원통형으로 조성되었는데, 표면에는 아무 조식이 없다. 상대석에는 8판의 앙련을 조식했다. 탑신부 역시 평면 8각의 형태로 문비형을 새기고 범자(梵字)를 양각했다. 옥개석의 하면은 편평하게 처리하였고, 두툼하게 조성한 기와골의 끝에는 큼직한 귀꽃을 배치했다. 상면에는 복발, 보륜, 보주가 차례로 놓여있어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중 보주는 앞서 살펴 본 보제존자석종의 그것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석종의 상륜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도에서는 이전 시 사리합이 수습되어 있다.
원구형석조부도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편 언덕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부도(石造浮屠) 중 원구형 부도이다. 이 원구형 탑신(塔身)의 부도는 간략하고 폭이 좁은 기단, 도식적인 연화문 등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연주문 받침 위에 보주를 두른 삼단형으로 구성된 상륜부가 있다. 상륜부 아래 지붕에는 연잎을 얹어 표현하였다. 기와골은 선명하게 나타내고 4개는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표현하였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을 마련한 기단부는 조각이 둔중하다. 편평한 상대석 위에는 형식적인 연꽃을 모각하였다. 팔각의 중대석에는 2단으로 나누어 연주문형 기둥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