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산(2011.8.10)
용봉산(龍鳳山) 유래(由來)
산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암괴석이 금강산과 비슷하다 하여 소금강이라고도 하는 용봉산(龍鳳山) !
지금의 용봉산은 고려시대에는 북산(北山), 조선시대에는 팔봉산(八峰山)이라 불렀다. 일제시대 때 홍성군 지역에 있는 산줄기는 용봉산, 예산군 지역에 있는 산줄기는 수암산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용봉사와 수암사라는 절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봉산은 골짜기마다. 문화재와 보물이 산재해 있으며, 다양한 전설이 곳곳에 전해진다.
예로부터 땅에서 사는 온갖 짐승과 새의 무리는 봉황이 지배하였고, 산 아래로는 물고기를 비롯한 물속의 모든 것들은 용의 지배를 받으며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로 하늘의 부름을 받아 승천하면서 산의 형상이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용봉산(龍鳳山)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수덕사옆 동네에 장모님이 살고 계신 관계로 가까이 있는 용봉산을 산행하려고 했는데 안개가 너무 짙게 내리워져 있다. 아침을 먹고 일찍 출발했다.
용봉산 마애불 입상(龍鳳山 磨崖佛 立像)
유형문화재 제118호
충남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산 80-4
마애불은 바위나 절벽의 평평한 면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다.
이 불상은 절 입구의 바위 면에 돋을새김한 입상이다. 불상의 오른쪽에 ‘정원(貞元) 15년’이란 글이 새겨져 있어, 799년(신라 소성왕(昭聖王) 원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머리는 큼직하며 육계(肉髻)는 팽이처럼 솟아 있고 얼굴은 타원형이다. 눈과 입은 얼굴에 비해서 가늘지만 미소가 얼굴 전명에 퍼져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내리고 왼쪽 손을 들어,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평안을 주는 시무외인(施無畏印)으로, 얼굴의 미소와 함께 평화와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U자형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얇게 표현되어 있어 불상을 평면적으로 보이게 한다.
용봉사(龍鳳寺)
용봉산 중턱에 위치한 용봉사는 1988년에 전통사찰 제67호로 지정된 곳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 절의 연혁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유물로 보아 백제 말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봉사는 돌축대 위에 자리자고 있는데 지금 절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다. 현재 자리 서쪽으로 조금 높은 곳에 절이 있었는데 그 터가 명당이라 하여 평양 조씨 일가가 묘를 쓰겠다고 절을 폐허화시켜 밀려 내려온 것으로 이 때 마을 주민들이 현재의 위치로 절을 옮겼다.
현재 용봉사에는 대웅전, 지장전, 산신각, 적묵당. 일주문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1689년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화 등 5점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유물로는 보물 355호 마애석불, 보물 1262호 용봉사영산회괘불탱, 유형문화재 118호 용봉사마애불, 문화재자료 162호 용봉사지석조(마애, 석구, 석조), 문화재자료 168호 용봉사부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이 많아 대찰의 면모를 보여준다.
용봉사지 석조(龍鳳寺址 石槽)
문화재자료 제162호
용봉산(龍鳳山)의 남쪽 골짜기에 용봉사(龍鳳寺)가 있다. 이 절의 서쪽능선에는 원래 고려시대의 용봉사가 있던 터가 있는데, 이를 구용봉사(舊龍鳳寺) 터 라고 한다. 현재 구(舊) 용봉사 터의 축대에는 자연석을 깎아 만든 고려시대의 석조(石槽)와 마애(馬磑)와 석구(石臼)가 있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쓰던 용기로 한쪽 모서리에는 물이 흘러 나가는 배수구가 있어 넘치는 물이 흘러내릴 수 있도록 홈을 만들었다. 마애(馬磑)는 일명 마대(馬碓)
또는 마학(馬硸)이라고도 하는데, 돌로 만든 멧돌방아로 네모난 모양의 돌로 되었다. 석구(石臼)는 돌절구로 네모난 모양으로 가공된 몸체에 팽이 모양의 둥그런 홈이 파여 있다.
용봉사 영산회상 괘불탱화(龍鳳寺 靈山會上 掛佛幀畵)
보물 제1262호
용봉사(龍鳳寺)의 괘불은 일체 번뇌와 마왕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정각(正覺)을 드러내는 모양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석가모니와 팔대보살(八代菩薩), 십대제자(十代弟子), 사천왕(四天王),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벽지불(辟支佛)을 그린 불화이다. 구도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상단을 3줄의 종렬로 이루었다. 석가모니불의 형상은 거신광배(擧身光背)를 지고 수미산(須彌山)에 있는 원만한 모습을 단아하게 표현하였다. 팔대보살 가운데 문수ㆍ보현보살은 수미산 옆에 각기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고, 관음보살은 화불(化佛)이 든 보관(寶冠)을 쓰고 있고 나머지 보살들은 각기 정병(淨甁)ㆍ경책(經冊)ㆍ연꽃가지나 여의(如意)를 들고 모두 석가모니 본존을 형하고 있다. 십대제자 가운데 아난ㆍ가섭존자은 흑갑사(黑甲紗)의 두광(頭光)을 지고 합장(合掌)한 자세를 하고 있고 나머지 목련존자 등은 녹색(綠色)과 흑갑사 두광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사대천왕은 석가모니의 오른편에 서ㆍ남천왕이, 왼편에 북ㆍ동천왕이 배치되었다. 제석천은 화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전형적인 보살의 형태이고, 범천은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조복(朝復)을 입은 제왕의 모습이다.
이 탱화는 조선 왕실의 불교신앙에 의한 것으로, 조선 숙종16년(1690) 5월에 화사(畵師) 진간(鎭干)에 의해서 그려졌는데, 괘불탱화의 크기는 593×550cm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탱화 중의 하나이다 용봉사에서는 매년4월 초파일에 이 괘불탱화를 대웅전 앞의 석축위에 걸어놓고 초파일 의식을 봉행한다.
병풍바위
홍성 상하리 미륵불(洪城 上下里 彌勒佛)
유형문화재 제87호
미륵불은 먼 훗날 이 땅에 출현하여 중생을 계도하는 미래의 부처이다. 이 미륵불은 용봉산 서쪽 기슭에 있는 절벽 밑에 우뚝 솟은 자연암석을 활용하여 조각한 입상이다. 머리는 정수리 부분이 평평하여, 귀는 직선으로 턱 밑까지 내려왔다. 가늘고 긴 눈, 넓적하고 낮은 코, 입은 비교적 작으나 얕게 평면적으로 돋을새김한 은은한 미소는 자비로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더욱 평면적이어서 가슴부분에 두 손을 아래위로 나란히 대고 있는데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왼손은 약간 떨구었다. 이외에 광배나 신광ㆍ대좌 등의 다른 부분은 생략하였다. 고려 중기에 조성된 충청도 지방의 불상 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