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2일차(2016.08.07)
제2일 6:00 뉴카멜리아호는 일본 하카다항(후쿠오카)에 입항하였다. 조식은 선내식으로 하고 9:00에 하선 및 입국 수속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 7대의 버스 주에 2호차에 승차하였다. 우리 차의 하나투어 가이드는 이영순양이었고, 아주 친절하고 가수 박정현을 닮았다고 많은 선생님이 말하였다. 일본 역시 폭염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첫번째 탐방지는 9:20 다자이후(大宰府), 11:00 다마나의 후나야마 (船山) 고분, 12:00 차량안에서 일정식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13:30 아리타의 도잔신사, 이삼평 도예지, 16:00 가라쓰의 나고야 성터 및 박물관, 17:00 두부나베 정식을 저녁을 먹고, 후쿠오카의 일류호텔 힐튼 씨호크호텔에서 숙박을 하였다.
뉴카멜리아호에서 바라본 하카다항의 모습
다자이후(大宰府)는 백제를 생각나게 하는 유적이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복신(福信)의 요청을 받은 사이메이(齊明) 여제(女帝)는 백제를 구원하려한다. 하지만 사이메이 천황은 같은 해 7월 현지에서 급사한다. 이에 황태자 나카노오오에(中大兄, 뒤에 텐지 천황)가 663년 8월, 마침내 400여 척의 배에 2만7000여 명의 군사를 태우고 백제땅으로 건너온다. 8월 27일과 28일 이틀 간의 백촌강(白村江) 전투에서 참패를 하고 만다. 3000여명에 이르는 백제 지배층이 이 때 패전한 일본 수군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텐지천황은 신라가 규수까지 쳐들어올 것으로 믿고 하카다만 연안에 있던 전진기지를 철수하는 동시에 이곳에 방어요새를 만들었다. 백제 유민들의 선진기술을 이용해 백제식 토성과 산성을 만들어 신라 침입에 대비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성이 바로 다자이후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수성(水城)이다. 수성과 함께 축성된 방어진지 중 하나가 다자이후 주변에 있는 오노성(大野城)이다. 백촌강 패전 이후 열도로 건너온 백제 귀족들의 지도에 따라 665년 축성됐다. 산등성이에 토루를 쌓고 골짜기에는 석축을 쌓는 형식이다.
다자이후의 건축과 수성의 축성은 백촌강 패전 후후 이루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다자이후 터에는 정청(政廳)인 거대한 집무소 자리가 남아 있다. 정청의 가장 중요한 건물인 정전(政殿)과 중문(中門)은 회랑으로 연결되었고, 그 안에 부속 전각(殿閣) 4개가 있었다. 다자이후는 규수 지역을 다스리고 외교를 담당하며 관문을 지키는 역활을 했다. 발굴조사 결과, 다자이후 신축은 백촌강 전투 패전 후인 7세기 중엽이며, 일본이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8세기 초에 정연한 건물이 개축되고, 914년 스미토모(純友)의 난때 타버린 것을 그 이후 복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자이후는 한때 나라(平城京)와 교토(平安京)처럼 북쪽 중앙의 정청을 중심으로 바둑판 같이 계획된 도시로 융성했었다.
후나야마(船山) 고분 -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길목에 있는 후나야마 고분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지금부터 140년 전인 1873년 1월 4일 이 일대의 땅 주인이 꿈에 후나야마 꼭대기를 파보라는 계시를 받고 발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상한 것은 발굴 즉시 유물에 대한 보고서가 나오지 않은 점이다. 메이지 후반에야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고분의 크기는 전장 62m, 폭 40m, 높이 7.5m로 지금 보는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고분에서는 집모양의 석관이 나왔다. 유명한 화산인 아소산 용암재로 만든 조합식 관 뚜겅이 있고, 석관 안은 단청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석관 내부의 길이는 2.2m, 폭 1.1m, 천장 높이 1.45m 이며 관 뚜껑은 좌우로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뒤늦게 밝혀진 이 고분 출토 유물은 모두 92건 이었다.
시간이 모자라서 차량에서 일정식 도시락과 녹차로 점심을 해결하였다.
이삼평 14대손이 나와서 설명하고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상
나고야성터 박물관
나고야성터
저녁으로 두부나베 정식을 먹었다.
후쿠오카 힐튼 씨호크 호텔에서 바라본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