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옛길
소백산은 수십번 다녔지만 죽령옛길은 처음이었다. 오늘따라 날씨는 무척 더웠서 봄인지 여름인지 분간이 안된다. 나무숲이 그늘을 만들어 줄 것 같았어나 아직 나무잎이 새싹 정도였다.
역사에 벽화를 그리고 있는 모습
백룡사 전경
명인(名人)의 자취
유서 깊은 이 고갯길에는 역사에 우뚝한 많은 명인들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삼국시대 이래의 사신들,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 남쪽 정벌길의 고려태조 왕건, 안향, 정몽주, 정도전, 옛 임금을 복위코자 목숨을 바친 금성대군, 왜적을 물리친 의병대장 유인석(柳麟錫), 이강년(李康秊)등.... 여기 두어 분의 자취만을 든다.
풍기(豊基)군수 주세붕이 낙향(落鄕)길의 이현보 마중
중종(中宗) 37년(1542) 7월 풍기군수 주세붕이 나귀에 술을 싣고 죽령에 와서, 예안(안동 禮安)으로 귀향(歸鄕)하는 선배 이현보(號 聾巖)를 마중했다. 명현(名賢) 이현보는 연달아 사직을 간절히 원했으나 임금의 극진한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73세 되는 이 해에 드디어 병을 핑계로 낙향하는 길이었다. 높은 학식과 행덕으로 사림의 우러름을 모은 이들은 30여년 선후배였으며 뜻을 같이 하는 특별한 사이로, 여기 고갯길에서 배반(배반)의 자리를 베풀어 회포를 나누었으니, 다음과 그 두 분이 읊은 시이다. -글 宋志香-
草草行裝白首郞 초라한 행장을 한 머리 쉰 사나이가
秋風匹馬嶺途長 가을바람 불 때 죽령 먼길을 말타고 가는데
莫言林下稀相見 나무밑에 모처럼 만난사람과 말하지 말라
落葉歸根自是常 낙엽이 떨어져 뿌리로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이현보
飄飄歸興趁漁郞 나부끼며 돌아가는 어부같이
直沂驪江玉帶長 바로 긴 한강을 거슬러 왔네
今日竹嶺回首意 오늘 죽령으로 돌아온 뜻은
乾坤萬古是綱常 천고 만고의 강사이 아니랴!
주세붕
서양 민들레가 예쁘게 피었다.
느티정(괴정) 주막거리 터
경상도 동북지역 여러 고을에서 서울로 통하는 이 길은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서울로 오르는 과거(科擧) 선비들, 공무를 띤 관원(官員)들, 부임(赴任)ㆍ귀성(歸省)ㆍ퇴임(退任)길의 여러 고을 수령(守令)들, 해륙(海陸)의 온갖 물화(物貨)를 유통하는 장사꾼들, 숱하게 넘나드는 민간 나그네들...., 사시사철 행객(行客)의 발길이 줄을 잇는 대로(大路)였기에 이 고갯길 굽이 굽이에는 길손들이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는 술집, 떡집에 짚신가게며, 먹고 자고하는 객점(客店)ㆍ마방(馬房)이 늘어있는 주막거리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곳이 지금 희방사역(喜方寺驛)이 있는 마을 어구의 「무쇠다리」주막거리였고, 그 버금이 고갯마루 주막거리, 여기 「느티정」이는 그 다음이었으며, 가장 작은 곳이 고갯마루 대밑의 「주점」이라는 주막거리였다.
서기 1934년경 5번국도가 열리고, 1940년대 초에 중앙선 철도가 통하면서 보행(步行) 나그네의 발길이 뜸해지다가 근년에 행객이 끊어져 길은 숲 덩굴에 묻혀버림과 함께 주막거리도 폐허가 되어 황량한 옛터엔 무너지다 남은 토담이며 우거진 잡초 속에 뒹구는 방앗돌 등이 세사(世事)의 무상(無常)함을 되새기게 한다. -글 宋志香-
도솔봉의 동삼(童蔘) 우리 고장의 전설
도솔보 어느 골짜기 산삼밭에서 가장 큰 산삼이 사람으로 변하여, 풍기장날이면 장을 보러 산에서 내려와 산밑 마을 앞을 지나다녔다. 이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초립동자(草笠童子)가 산에서 내려와 어디를 갔다가 해질 무렵이면 자기집 앞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수차례 보았다. 농부는 이 초립동자가 도솔봉에 사는 산삼(山蔘)일 것이라 생각하고 음식으로 잘 대접하여 산삼을 얻으리라 마음먹고 풍기 장날만을 기다렸다. 풍기 장날이 되어 농부는 동자가 내려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동자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반가워하며 동자의 뒤를 따랐다. 계절로 보아 그 때는 늦 가을철 쯤 되었는데 장터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되어서였다. 동자가 늘 장보러 오면 들르는 음식점으로 들어가자 농부가 따라 들어가 한자리에서 음식을 청하여 먹었다. 농부가 미리 나와 동자의 음식대를 계산하자 동자가 모르는 처지인데 음식값을 지불한 까닭을 묻자 농부는 오늘 서로 동행하는 처지인데 얼마되지 않아 계산했다고 했다. 동자와 농부는 같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도중 느티나무 밑에서 잠시 쉬는 동안 농부가 본심을 털어 놓았다. 동자는 미리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며, 자기가 도솔봉 산삼밭에 가장 큰 동삼인데 사람으로 변하여, 사람행세를 하고 있다고 하며 농부의 원을 들어 줄테니 같이 삼밭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도솔봉 삼밭에 올라가면 자기가 가장 큰 삼으로 변하여 들어갈 테니 나를 뽑지 말고 그 밭의 산삼을 캐라고 하였다. 그러나 농부는 가장 큰 삼을 보자 마음이 변하여 동자의 부탁을 저버리고 그 큰 삼을 두손으로 당겼으나 삼은 뽑히지 않고 삼뇌두만 떨어지고 장터에서 먹은 음식들이 쏟아져 나온 뒤 산삼밭이 사라져 버렸다. 이 농부는 동삼이 시키는 대로 하였으면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을 욕심을 부려 폐가(廢家)하고 마침내 병으로 죽었다 한다.
잔운대(棧雲臺)ㆍ촉령대(矗泠臺)
명종(明宗) 3~4년(1548~1549) 풍기군수 이황(李滉, 號 退溪)이 그 중형(仲兄) 해(瀣, 호 溫溪)를 마중하고 배웅하던 자리다. 퇴계의 형 온계는 그 무렵 충청감사로 있으면서, 말미를 얻어 고향 마을 예안에 다니는 길에 매양 퇴계는 주효(酒肴)를 마련하여 여기 죽령에서 마중하고 배웅했다. 퇴계는 이 고갯길 경치 있는 한 굽이를 다듬어 형제의 우애를 즐길 자리로 동ㆍ서 두 대(대)를 쌓았으니, 동쪽을 잔운대(棧雲臺), 서쪽을 촉령대(矗泠臺)라 했다. 「잔운(棧雲)」이라 함은 저 성종(成宗)조의 학자 명신 유호인(兪好人)의 詩 “竹嶺行百盤 棧道浮雲邊(서리 서리 죽령길 높기도 해라. 가파른 사다릿길 구름에 닿네)”에서 취함이요, 「촉령(촉령)」이라 함은 같은 때의 학자 김종직(김종직)의 “雲根水矗矗泠泠(구름은 삐죽삐죽 물소리 시원)”에서 취함이다. 여기서 읊은 퇴계 형제의 시가 전한다. -글 宋志香-
爲破天荒作一臺, 鴒領原常苃送迎來.
자연을 다듬어서 대를 꾸미니, 감사형님 마중 배우위함이로세
冷冷恰似歡情溢, 矗矗眞如別恨堆.
기쁘고 정겨워라 물소리 졸졸, 이별이 아쉬운 양 멧부린 우뚝
鴈影峽中分影日, 銷魂橋上斷魂時.
안영협 냇가에서 나뉜 그림자, 소혼교 다리에서 애끓이는데,
好經嶺路千盤險, 莫負明年再到期.
평안히 넘으소서 험한 고갯길, 명년 다시 오실 기약 지키옵소서. -퇴계-
西日奄奄苦不遲, 躊躇橋上酒柬時.
어느덧 서산에 해는 지는데, 술 끝나도 다릿가에 서성거리네,
雲山聽我丁口寧 說, 好待明年來有期
구름 산도 분명 내말 들었으려니, 내년에 다시 오리 기다리게나. -온계-
가장 작은 곳이 고갯마루 대밑의 「주점」이라는 주막거리였다.
신라의 명신 죽지(竹旨)
죽령에서의 기연(기연)으로 태어난 신라의 명신 죽지
신라가 한창 삼국통일의 꿈을 펼쳐갈 무렵이다. 명신 술종(述宗)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부임하는 길에서였다. 여기 죽지령(竹旨嶺:죽령 옛이름)을 넘다가 술종은 고갯마루에서 길을 닦고 있는 한 거사(居士)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뜻이 통했다.
부임해서 한달쯤 뒤 어느날 술종은 그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의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이상히 여긴 술종은 곧 사람을 죽령으로 보내어 거사의 안부를 알아오라 했던바 거사는 이미 죽었더라는 보고였다. 술종은 채비를 마련 역군을 보내어 죽령마루 언덕에 거사를 장사하고 돌미륵을 조성하여 무덤앞에 세웠다.
거사가 죽은 날짜가 바로 술종이 꿈을 꾸던 그 날인지라 술종은 「거사가 아마 우리 집에 태어나려는가 보다」고 했다. 과연 그 부인이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을 죽지(竹旨)라 했다. 자라서 화랑(花郞)이 되어 김유신과 더불어 통일대업에 큰 공을 이루고 재상(宰相)이 되어 진덕왕(眞德王)에서 무열왕(武烈王)ㆍ문무왕(文武王)ㆍ신문왕(神文王)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신라의 흥륭(興隆)과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죽지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한 득오곡(득오곡)이 죽지를 사모하여 지은 『모죽지랑가(모죽지랑가)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 글 宋志香-
慕竹旨郞歌 모죽지랑가
去隱春皆理米 가는 봄이 그리워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모든 것이 서러워 우네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兒史 아담한 얼굴에
年數就音隨支行齊 주름살 지는 것을
回煙廻於尸七史伊衣 잠시 사이 나마
逢鳥支惡知作守下是 만나뵙게 되었으면
郞也幕理尸心未行乎爭尸道尸 님이여 그리운 마음으로 가시는 길
逢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쑥대마을 자고 갈 밤 있으실까
신종(神鐘)이 보인 이변(異變)
안동에서 오대산 상원사(上元寺)로 옮겨지던 동종(銅鐘)이 죽령에서 일으킨 놀라운 이변
『무게 3,379근, 우렁차고 맑아 멀리 백리에 들린다』고 <영가지(永嘉誌)>에 전하는 국내 최고(最古) 최미(最美)의 범종(梵鐘)이라는 이 종은 본래 안동 어느 절에 있다가 안동부(安東府) 남문루에 옮겨져 시각을 알리는 구실을 맡고 있었다. 세조(世祖)가 상원사를 원당사찰(願堂寺刹)로 정하고, 국내에서 가장 좋은 종을 구하는데 이 종이 뽑혀 예종(睿宗) 1년(1469) 가을 왕명으로 수백명의 군졸과 백여필의 우마를 동원, 안동에서 상원사로 운반 도중 죽령에 다달아 종은 은은히 구슬픈 소리를 내면서 종을 실은 수레가 갑자기 땅에 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온갖 방법을 다 해봤으나 종은 사뭇 억척이어서 감독관원은 백방으로 궁리 끝에 「이 종이 옛 고장을 떠나기가 서러워서인가」여겨, 종의 젖꼭지(鐘乳) 하나를 떼어 안동에 보내고 나서야 마침내 종이 움직였다. 이 종은 36개의 젖꽂지에서 그 한개를 떼어낸 자리가 지금도 선연하다. -글 宋志香-
현호색 군락
중앙고속도로 교각 밑으로 희방사역이 보이고 기차가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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