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간사(西磵祠)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서미동
이 강린당(講麟堂)은 인조(仁祖)때 판서(判書)로 계셨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선생께서 낙향하여 제자를 모아 강론하던 곳이다.
본래 이 건물 이 외에 숙종(肅宗) 15년(1689) 지방 사림에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간사가 있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왔으나 흥선대원군 당시 헐려 지금은 강린당만 남아 있다.
선생의 자(子)는 숙도(淑度) 호(號) 는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이다.
관직(官職)은 좌의정(左議政) 증직(贈職)은 영의정(領議政) 시호(詩號)는 문정공(文正公)으로 효종(孝宗)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있다.
서간사의 유래는 <정조실록 21, 10년 2월 병신>에 비교적 잘 소개되고 있다. 영남 유생 김제묵(金濟默) 등이 상소하여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안동(安東) 목석거유허사(木石居遺墟祠)를 서원(書院)으로 승격하고 편액을 하사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선정의 관향이 안동부이고 이 지역에 물러가 살았으니, 안동부와 이 지역에 선정의 사당을 세워서 영남 사람들이 존경하는 생각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비록 서원으로 승격해 달라고 말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사당에다 편액을 하사하여 옛날의 경관을 바꾸지 않아야만 목석과 같이 살겠다는 선정의 평소 지조에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 하고, 사호(祠號)를 ‘서간(西磵)’이라고 내려 주었다고 한다. 또한 하교하기를,“서간사(西磵祠)의 편액을 하사할 때에 측근의 신하를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라. 아침에 납언(納言)의 상소에 문충의 절의(節義)에 대한 대목에 이르러 감격된 바가 있었는데, 문정의 편액을 하사할 때와 마주쳤으니, 우연이 아니라고 하겠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날을 가려 치제(致祭)하도록 하라.”에서 그 역사적 유래를 확인할 수 있다.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자료가 나왔는데 지금 현재로는 확실하게 규정하기 어렵고 여러 견해가 있다. 첫째 현종 10년(1669년)에 처음에는 지방사림에 의하 '서간정사'를 지어 선생을 배향하였다. 둘째, 영조 45년(1769년) 셋째 숙종 15년, 넷째 正祖 乙丑(1785) 등이고 사액연대는 正祖丙午(1786)이고 西磵祠라 사액하였고, 현재는 강당만이 남아 있는데, 안에는 '西磵書堂重建記', '講麟堂重建上樑文' 등의 현판이 남아 있었다. 남인의 세력이 지배적인 이곳에 노론계통의 서원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서간사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여러 가지로 분분한 것이 이를 반영한다. 서간사를 지으려 할 때 남인의 세력들이 서간사를 몰려 부수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남인의 세력이 강한 지역에 노론 계열의 서원이 지어지는 것이 얼마는 어려운 일인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강인당 건물만 남아 있고 강인당 안에는 '西磵書堂重建記', '講麟堂重建上樑文' 등의 현판이 남아 있을 뿐이며, 강인당 안은 정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강인당 밖에는 시에서 새로 건립해준 담장이 멋을 더해 주긴 하였지만 향사가 없는 관계로 다른 서원에 비해 관리가 허술한 편이다. 강인당 뒷편에는 '목석거유허비'가 아주 멋진 풍광을 이루었는데, 산꼭대기에 있는 중대바위가 이들을 보호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펌)
중대바위 아래에 위치한 서간사는 서간정사(현종 10년 1669)를 지어 청음 선생을 배향하였으나 정조 10년(1786)에 서간사로 사액되었는데, 현재는 강당만이 남아 있다.
관리가 잘되지 않아서 마당과 집주변에는 마른 풀들이 무성하다.
서간사 뒤로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더욱 서간사를 돋보이게 하였고, 어떤 서원에서도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비각이다. 이는 청음 선생의 7대 손인 김학순이 순조 30년(1830년)에 세운 비석과 비각으로 '木石居遺墟碑'라고 적혀 있다. 이 비는 거대한 둥근 바위(빗집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데, 바위정면에는 '木石居'라는 암각서가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가 171㎝, 너비가 72㎝, 두께가 21㎝이다. 김학순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영남어사와 안동부사, 관찰사, 도승지, 공조판서 등 40여 년 관직에 몸담았던 분이다. 사방으로 넓적한 커다란 바위 위에 자리잡은 '목석거유허비'는 빗집바위 위에 얹혀 있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는 그냥은 올라갈 수도 없을 만큼의 높이다. 앞으로는 학가산의 정기가 느껴지는 이곳이 바로 노론의 핵심인물인 청음이 서원을 세웠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남인의 근거지에서 한참이나 물러나 있었던 곳, 그러면서도 절경이 있는 그런 곳이다.
개목사 원통전(09.2.14) (0) | 2009.02.20 |
---|---|
봉림사지 3층석탑(09.2.14) (0) | 2009.02.20 |
주실마을2(09.1.7) (0) | 2009.01.22 |
주실마을1(09.1.7) (0) | 2009.01.22 |
영양 서석지(09.1.7) (0) | 2009.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