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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09.2.25)

가까운 곳 여행/문화유산

by ninesun 2009. 3. 13.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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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일대

 

  삼충사(三忠祠)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 ?∼656), 흥수((興首), ?∼?), 계백((階伯), ?∼660)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祠堂)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 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다.

 

 

영일루(迎日樓)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이 영일루가 있는 이곳은 부소산(扶蘇山)의 동쪽 산봉우리에 해당된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迎日臺)가 있어서 계룡산(鷄龍山)의 연천봉(連天峰)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 전한다. 지금의 건물은 1964년 5월 홍산(鴻山)에 있던 조선시대(朝鮮時代)의 관아문(官衙門)을 옮겨 세우고, 이름을 영일루라 한 것이다.

 

 

 

군창지(軍倉址)

이곳은 부소산성 동남쪽에 있는 창고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 때 세워진 창고터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지어진 창고터까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평탄한 대지 위에 마당을 가운데 두고 건물을 ‘ㅁ'자 모양으로 배치하였다. 동쪽과 서쪽 건물은 정면 10칸 측면 3칸이고, 북쪽 건물은 정면 18칸 측면 3칸의 긴 평면으로 되어 있다. 남쪽 건물은 훼손이 심하여 확실치는 않으나, 서쪽에 치우쳐 안마당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 때의 4각형 및 원형의 주춧돌과 조선시대의 분청사기 및 백자조각이 출토되었다. 불에 탄 곡식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므로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나 유사시에 필요한 피난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이 유구(遺構)는 1980년 발굴조사에서 노출된 3개소의 움집터 중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지표(地表)아래 풍화암층(風化岩層)을 깊이 70cm ~ 90cm정도 깎아 내려가 방바닥을 이루었는데, 평면은 네모꼴로 한 변의 길이가 약 4m이다. 남쪽변 중앙에는 출입계단이 있고 그 양쪽에 기둥구멍이 있어 출입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터의 가운데에는 기둥을 세웠던 4개의 구멍이 바닥에 네모꼴로 위치하여 있다. 또 부뚜막을 겸한 외골의 구들이 동쪽벽을 따라 시설되었는데 그 남쪽 끝에서는 구들골의 옆 방향에서 불을 지폈던 아궁이가 있고, 북쪽은 집밖으로 굴뚝이 시설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방의 서북쪽에 ㄱ 자형 얕은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그 위에 목재를 걸치고 짚등을 깔아 침상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움집자라 남쪽으로 좀 떨어진 비탈아래에 저장구멍과 목책을 세웠던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 움집자리는 아궁이 바닥에서 출토된 백제토기 뚜껑과 집 주위에서 출토된 무구류(武具類)의 유물 등으로 보아 5~6세기 백제 병영의 집자리로 추정된다. 1991년 이 유구의 전시를 위하여 원래의 유구위에 전시관을 세우고 그 옆에는 추정 복원한 모형의 움집을 세웠다.

 

 

 

 반월루

 

 

 사자루(사비루)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이곳은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은 자리로,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었던 곳이다.

 백제때에는 이곳에 망대(望臺)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개산루(皆山樓)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사자루(사비루)라 이름 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자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사자루의 앞면 현판 글씨는 조선말 의친왕 이강 公이 쓴 것이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사방이 트여있어 부여 주변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건물을 세울 때 이곳에서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연리지(連理枝)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을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지(連理枝)라 한다. 두 몸이 한몸이 된다하여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흔히 비유하였다. 알기 쉽게 ‘사랑나무’라고도 이른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을 읊은 시 ‘장한가(長恨歌)’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七月七日長生殿 (7월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한은 끝없이 계속되네)

이 시에서 비익조는 날개가 한 쪽 뿐이어서 암컷과 수컷의 날개가 결합되어야만 날수 있다는 새로서 연리지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백화정(百花亭)

   문화재자료 제108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평면을 6각형으로 지은 정자이다. 백제 멸망 당시 궁녀들이 이곳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의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띄우고 남쪽에 나무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평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천정에는 여러 가지 연꽃 문양을 그려 놓았다. 정자에 올라서서 보면 주변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낙화암(落花岩)

  문화재자료 제110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백제의 700여년의 왕조가 무너지던 날 의자왕의 궁녀들이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원혼을 묻었다고 전하는 곳이다. 낙화암이라 이름지어진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 당시 궁녀의 절의(節義)를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해서 이름 붙인 것이다. 암벽에 송시열(송시열 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落花岩)”이라고 조각된 글자가 있다. 1929년에는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낙화암 바위의 꼭대기에 육각형의 백화정(百花亭)을 건립하였다.

 

 

 

 

 

 

 고란사(皐蘭寺)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1

 고란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백제 제17대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절 이름은 뒤편 암벽에서 자라고 있는 고란초에서 따왔다.

  법당 건물은 조선 정조 21년(1797)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겨진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 험준하며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고란약수와 어린이가 된 할아버지

  부여 부소산 낙화암 아래에 있는 고란사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약수에는 간난아기가 된 할알버지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득한 옛적 소부리의 한 마을에 금슬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늘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다시 한번 회춘하여 자식 갖기를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는 일산(日山:금성산)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 고란사 바위에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날 새벽 남편을 보내 그 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다음날 일찍 약수터로 찾아가 보니 할아버지가 없고 웬 간난아이가 남편의 옷을 입고 누워 있어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아차했다. 도사가 한잔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남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간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이 할아버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부소산 서복사지(扶蘇山 西腹寺址)

  기념물 제161호

 백제시대의 부소산 서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 절터는 궁원에 속한 기원사찰(祈願寺刹)로 추정된다. 1980년에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중문지(中門址)ㆍ탑지(塔址)ㆍ금당지(金堂址)가 남북일직선상에 있는 절의 건물 배치 방식을 확인하였으며 정교한 축석 및 판축으로 조성된 기단이 노출되었다. 또한 흙으로 구운 소조불상(塑造佛像)ㆍ연화문 수막새ㆍ벽화편 등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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