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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09.5.4)

가까운 곳 여행/문화유산

by ninesun 2009. 5. 7.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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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上院寺)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이 절은 705년(성덕왕 4)에 성덕왕이 창건했다. 효소왕(692~701 재위) 때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 입산하여 동쪽에 있는 만월산(滿月山)에는 일만관음보살을, 서쪽에 있는 장령산(長嶺山)에는 일만대세지보살을, 남쪽에 있는 기린산(麒麟山)에는 일만지장보살을, 북쪽에 있는 상왕산(象王山)에는 일만미륵보살을, 중앙에 있는 지로산(地盧山)에는 일만문수보살을 첨례(瞻禮)했다. 그뒤 성덕왕이 된 효명이 다시 이 산을 방문하여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하고, 문수보살상을 조성하여 봉안함으로써 이 절이 창건된 것이다. 그뒤 1376년(우왕 2)에 영암이 중창했다. 1464년(세조 10) 왕이 이곳에 행차했다가 문수보살을 배알한 후 고양이 덕분에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하는데 이로 인해 다음해에 중창하고 전답을 하사했으며, 이것을 영산부원군 김수온(金守溫)에게 기록하도록 했다. 〈상원사중창권선문 上院寺重創勸善文〉이 남아 있다.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1904년에 선원(禪院)을 개설하고 1907년에 수월화상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선원인 청량선원(淸凉禪院), 승당인 소림초당(小林草堂), 종각인 동정각(動靜閣), 영산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문수동자좌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 23점(보물 제793호), 동종(국보 제36호) 등이 있고, 〈상원사중창권선문〉은 한문과 한글이 병기되어 있어 한글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브리테니커)

 

 

 

 

 상원사동종(上院寺銅鍾)

     국보  제36호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 상원사 

  현존(現存)하는 한국종(韓國鍾)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종은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24년(725)에 조성(造成)되어 조선(朝鮮) 예종(睿宗) 원년(元年)(1469)에 상원사(上院寺)에 옮겨진 것으로, 한국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범종(梵鍾)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종뉴(鍾뉴) 아래에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鍾身)이 연결된 형태인데, 이상적인 비례와 안정감 있는 구조, 풍부한 양감(量感)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수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종신에 있는 상대(上帶)·하대(下帶), 네 곳에 있는 유곽(乳廓)의 문양은 모두 당초문(唐草紋)을 바탕으로 2∼4인의 작은 비천상(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圈紋)이 새겨졌고, 종복(鍾腹)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엽(葉)의 단판연화문(單瓣蓮華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흩날리며 공후와 생(笙)을 연주하고 있는데,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理想的) 사실풍(寫實風)의 불교조각(佛敎彫刻) 양식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 상대·하대, 네 곳에 있는 유곽의 구조적인 특징은 한국종의 전형(典型)이 되어, 양식적인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이후의 모든 종에 계승된다.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上院寺木彫文殊童磁坐象) 

           국보  제221호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 상원사

  예배의 대상으로서 조상(彫像)이 된 동자상(童子像)으로는 국내 유일의 유물(遺物)이며, 동자상(童子像) 조상(彫像)의 유래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우견편단(右肩偏袒)에 영락(瓔珞)을 늘어뜨린 보살형(菩薩型) 양식인데, 보살상과 다른 것은 보관(寶冠) 대신 머리를 양쪽으로 묶어 동자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다. 납의(衲衣)로 허리띠를 질끈 묶어 동자의 천진성(天眞性)을 표현하고 있다. 얼굴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며, 볼과 입가에서 동자의 천진성이 잘 나타나 있다.

  대좌(臺座)는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동자상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하여 광배(光背)도 마련하지 않았다. 수인(手印)은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하품하생인(下品下生印)과 같이 하고 있다.

  이 동자상은 고려불상(高麗佛像)의 양식에서 조선(朝鮮) 전기(前期) 양식으로 전개되는 양식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조선(朝鮮) 전기 조각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오대산(五臺山)은 신라(新羅)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中國)의 오대산문수신앙(五臺山文殊信仰)을 받아들인 이래 문수도량(文殊道場)으로 유명하다.

  이같은 전통적인 문수신앙이 조선조(朝鮮朝) 세조(世祖)의 문수신앙을 낳게 하고, 세조(世祖)의 문수신앙 체험이 동기가 되어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을 제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과 전설(傳說)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문화재청)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문수전 뒤에 있는 정면3칸,측면2칸의 맞배집으로, 1946년 화재가 났을 때 유일하게 모면한 덕분에 오대산 안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안에는 석가 삼존상과 십육 나한상을 봉안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서 영산전이라 한다.

  용악 혜건(龍岳 慧堅 : 1830 ~ 1908)스님이 1899년에 해인사의 고려장경 4부를 인출(印出)하여 삼보사찰에 각기 1부씩 모시고 1부는 전국의 유명한 사찰에 나누어 모셨는데 그 중 일부인 39함(函)이 여기 영산전에 모셔져 있었다.

조선 세조가 희사한 39함의 고려대장졍이 보관되었다. 현재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4호) 

영산전 석탑

  영산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은 기단부터 상층부에 이르기까지 탑 전체가 여러 가지 무늬와 불상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석탑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심하게 파손되어 탑신의 형체를 알 수 없고 탑의 층수마저도 파악되지 않은 채 전한다.

  이탑의 존재 사실을 알려 주는 가장 오랜 자료는 일제시대 때에 이탑이 영산전 앞에 서 있는 사진이다. 이 석탑은 다시 해체되어 얼마전까지 영산전 오른 편 뒤에 서 있었으나 상원사를 단장할 때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기단부에는 구름과 용 그리고 연쏯 등의 무늬가 새겨지고 탑신부에는 주로 불상이 한 면에 2~4구씩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의 탑으로는 경천사지10층석탑과 현화사 칠층석탑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대탑이 있다.

  또한 신륵사 다층석탑과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석탑 역시 같은 계열의 탑이라고 볼 수 있다. 상원사 영사전 앞 다층석탑은 탑신에 장식을 한 석탑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비록 복원이 어려운 상태로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이만큼이라도 남아 있음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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