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고달사지(驪州高達寺址)
사적 제382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외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절터 안에는 깔끔한 모양과 세련된 조각수법의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를 비롯하여 훌륭한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는 원종대사의 행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탑비로 975년에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은 원종대사의 묘탑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이 있어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긴 고달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이 있다.
최근에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를 확인하고, 절터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고달사지석불좌(高達寺址石佛座)
보물 제8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20-5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불좌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중간·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고달사지부도가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달사지석불좌(高達寺址石佛座)
[이 석불대좌(石佛臺座)는 불상(佛像)은 없어진 채 대좌만 덩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고 조각솜씨가 명쾌한 4각대좌의 수작이다. 이 대좌는 장방형(長方形)의 석재를 상·중·하대 등 3중으로 겹쳐놓은 이른바 방형대좌(方形臺座)이다.
상대(上臺)는 앙련(仰蓮)을 시원하고 뚜렷하게 조각했고, 중대(中臺)는 4면에 모두 하나의 큼직한 안상(眼象)을 음각하였는데 솜씨가 명쾌하며, 하대(下臺)는 상대와 같은 수법의 연꽃을 복련(覆蓮)으로 새기고 그 아래로 안상(眼象)도 조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방형(方形)의 중첩과 연꽃과 안상무늬의 교체를 명쾌하고 산뜻한 조각솜씨로 조화시킨 고려(高麗) 초기(初期) 역작(力作)의 석조대좌라 할 수 있다.]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龜趺 및 螭首)
보물 제6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7-3
고달사터에 세워져 있는 비로, 원종대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으며, 비몸은 깨어진 채로 경복궁으로 옮겨져 진열되어 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한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꼬리가 길게 치켜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격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 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碑座)를 돌출시켜 놓았다.
머릿돌은 모습이 직사각형에 가깝고,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이 짧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점, 비머리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특히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진전되는 탑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龜趺 및 螭首)
[이 귀부(龜跌)와 이수(이首)는 『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석(碑身石)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비는 일찍이 무너져 신석(身石)은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에 옮겨져, 현재는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 서쪽화랑(西廻廊)에 진열되어 있으며 이곳 고달선원(高達禪院)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원종대사(元宗大師)는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9년(869) 13세에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에서 융제선사(融諦禪師)에게 사사(師事)하였다. 22세에 양주(楊州)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藏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23세에 입당(入唐)하여 서주(舒州) 동성현(桐城縣) 적주산(寂住山)에서 자선화상(子禪和尙)에게 사사(師事)하였으며 경명왕(景明王) 5년(921)에 환국(還國)하여 봉림사(鳳林寺)에 거주(居住)하였다. 그후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서 고려(高麗) 광종(光宗) 9년(958) 8월에 90세로 입적(入寂)하니 왕이 애도(哀悼)하여 원종대사(元宗大師) 혜진(慧眞)이라 추시(追諡)하고 '진영일정(眞影一幀)'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大師) 입적 후 17년에 이 비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귀부(龜跌)는 거대한 단일석(單一石)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龜甲紋)이 장식되어 있으며 장방형(長方形)의 비좌(碑座)는 운문(雲紋)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蓮華座) 위에 조출(彫出)되고 상면(上面) 둘레에는 복련문(覆蓮文) 이 조출되어 있다. 네 다리와 손톱 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龜頭)의 면모(面貌)는 흔히 볼 수 있는 용형(龍形)이다.
이수(이首)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寶珠)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
고달사지의 발굴 현장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보물 제7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3
넓은 절터 안에 많은 석조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탑비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이 부도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아래받침돌은 네모난 형태이며, 가운데받침돌 윗부분부터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즉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 사이에는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날고 있다. 윗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신은 4면에는 문(門)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위로 향하였고 꽃장식이 달려 있다. 꼭대기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듯 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 부도는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면서 아래받침돌을 네모반듯하게 짰음은 시대적인 특색이라 하겠다. 가운데받침돌의 조각은 가장 두드러지게 고려시대의 수법을 나타내었고, 각 부의 조화도 우아하고 화려하다.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 하지만 좋은 비례를 보여준다.
이 탑의 주인공인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869)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958)에 90세로 입적한 고승이다.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비문에 의하여 고려 경종 2년(977)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국보 제4호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1-1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부도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
고달사지쌍사자석등(高達寺址雙獅子石燈)
보물 제282호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고달사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2.43m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까지만 남아있었으나, 2000년에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
직사각형의 바닥돌 4면에 둥글넓적한 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아래받침돌 대신 2마리의 사자를 앉혀 놓았다. 사자는 좌우에서 앞발을 내밀고 웅크리고 있으며, 등 위로 구름이 솟아올라있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돋을새김하였고,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그 위에 놓인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뚫었다.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서있는 자세가 대부분인데, 이 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적이며,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옥산사 마애여래좌상(09.5.24) (0) | 2009.0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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