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 성지(舟論 聖地)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舟論)이란 지명은 이곳 지형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한국천주교회 초기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 들어와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왔다. 이곳은 초기 한국천주교의 역사와 관련하여 세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첫째,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가 쓰여진 토굴이 있는 곳이다. 1801년 2월 황사영(알렉시오)은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서 토굴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토굴 속에서 순교자들의 죽음을 세계교회에 전하고, 박해로 무너진 천주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간곡한 서신을 써서(帛書, 13,384자)북경에 있는 구베아(Gouvea)주교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보내지기 전에 백서는 압수되고 그 또한 체포되어 그해 11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백서는 현재 교황청 선교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둘째, 우리나라의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첫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1855년 초 성인(聖人) 장주기(張周基,요셉)의 집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에서는 프랑스인 푸르티에(Pourthie), 프티니콜라(Petitnicolas)신부의 지도 아래 김 사도요한, 권 요한, 유 안드레아 등 10여명의 신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라틴어, 철학, 신학 등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신학생들이 사제양성의 열매를 맺을 무렵인 1866년(丙寅年)초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 결과 두 신부와 장주기가 각각 서울 새남터와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셋째,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신부의 묘가 있는 곳이다. 그는 1836년 12월 중국 마카오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고, 184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2년 동안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혼을 구하려는 불같은 열정, 그리고 훌륭한 판단력 등으로 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과로로 1861년 6월 문경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해 11월 성요셉 신학교 뒷산 언덕에 묻혀 사제의 길을 걸으려는 후학들의 길을 밝혔다.
이와 같이 배론성지는 종교적인 면에서 교회사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역사의 땅이요 교육의 땅이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배론 신학교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1855년 조선교구의 장상이던 메스트르(Maistre,1808~1857)신부는 박해 아래서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의 집에 우리나라의 첫 교구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에서 1856년 교장으로 부임한 푸르티에(Pourthie, 1830~1866)신부와 1861년 말에 부임한 프티니콜라(Petitnicolas)신부는 김 사도요한, 권 요한, 유 안드레아, 임 빈첸시오, 박 필립보, 이만돌(바울리노), 이 토마스 등 신학생들에게 라틴어, 수사학, 철학 및 신학 등 서양 학문을 가르쳤다. 신학생들은 몇 명씩 세 개의 마을에 기숙하면서 신학교를 오가며 공부하였다. 신학교의 주보성인은 성 요셉이다. 신학교는 박해와 건강 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구장 베르뇌(Berneux, 1814~1866) 주교의 전폭적인 지원, 선교사들의 애정, 그리고 신자들의 기도에 힘입어 사제 양성소로서의 역할을 다했으며, 그 결과 1866년 라틴어 과정 4명, 신학 과정 2명, 삭발레자(削髮禮者) 1명, 소품자(小品者) 1명 등 8명의 신학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병인박해(1866)가 일어나면서 두명의 신부와 장주기, 그리고 세명의 신학생이 순교함으로써 신학교는 문을 닫았다. 옛 신학교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현 건물은 2003년 충청북도의 지원으로 복원된 것이다.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은 1801년 2월 말 신유박해를 피해 배론에 살던 신자인 김귀동의 집으로 왔다. 그는 옹기 저장고로 위장한 토굴 속에 8개월간 은신해 있으면서 9월 22일 백서(帛書)를 완성했다. 백서는 모두 122행으로 구성된 13,384자의 글자를 비단에 쓴 것으로 북경교구장 구베아(Gouvea, 1751~1808)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되었다. 백서의 내용은 인사말(1~5행), 신유박해의 발단과 그 진행과정(6~32행),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신부와 총회장 최창현(崔昌顯, 요한)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열전(32~90행),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90~119행), 관면 요청과 맺은말(119~122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황사영은 9월 29일 의금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백서도 압수되었으며,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황사영은 같은 해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처형되었다. 백서는 1925년 79위 시복식(諡福式)때 교황 비오 11세께 증정되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토굴은 1987년 서울대 이원순 교수의 고증에 의거하여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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