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시습재(安東 時習齋)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0호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이 집은 화산(花山) 권주(權柱, 1457~1505)의 고택이다. 이 집의 건립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중엽에 후손들에 의해 중건된 것으로 전한다.
권주는 도승지(都承旨)와 경상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 연산군(燕山君)11년(1505)에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 때 가족들은 예천(醴泉)으로 이주하여 빈 집으로 방치되었으나 18세기 중엽에 후손들이 들어와 다시 살았다고 전한다.
건물은 드넓은 풍산들을 바라보면서 정산(井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500여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6칸 대청의 큰 가옥이다. ‘ㅁ'자형 안채와 북쪽에 담장으로 별도로 구획된 사당이 있다. 약 60년 전에 대문간 오른쪽에 있던 사랑채를 철거했다고 전한다.최근에 보수가 이루어졌고, 보물 제549호로 지정된 권주 종손가 문서(權柱 宗孫家 文書)와 보물 제1002호로 지정된 권주 종손가 문적(文籍)이 보관되어 있다.
절의로 지켜온 송백(松柏)의 푸름
‘7대 동안 금부도사가 세 번 찾아온 영남의 유일한 가문’. 가일 안동권문의 의리정신을 잘 드러내주는 수식어다. 그 중심에는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화산(花山) 권주(權柱, 1457~1505)와 신사무옥 때 참화를 당한 권전(權磌, 1486~1512), 그리고 이인좌의 난으로 고초를 겪은 병곡(屛谷) 권구(權榘, 1672~1749)가 있다.
권주는 연산군이 즉이하여 난정(亂政)을 행하자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았으며, 폐비윤씨 복위에 반대하다가 평해로 유배되어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 그의 차남 권전은 성균관에 수학할 당시 소수(疏首)가 되어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소를 올렸으나 부결되자 세 번에 걸쳐 다시 청한 끝에 왕의 허락을 받아낼 정도로 굴함이 없었다. 이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좌되어 파직을 당했고, 1521년의 신사무옥 때 목슴을 잃었다.
안동권문은 양대에 걸친 참화로 벼슬길을 멀리하고 음직(蔭職)으로 가세를 이어나가다가 구봉(九峰) 권박(權搏, 1607~1661)에 이르러 비로소 관직에 나갔다. 그 역시 성품이 강직하여 세도를 믿고 횡포하는 자들을 멀리했던 탓에 수차례 귀양을 가기도 했다. 병곡 권구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지만 불의에 항거하는 선비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당파로 분열된 현실을 개탄하여 학문에만 뜻을 두었는데, 이는 분열과 대립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경계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영조에게 친국을 받을 때 올곧은 당당함으로 맞섰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폭정이 난무하는 시대적 현실을 좌시하지 않고 강직함으로 맞서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올곧음이야말로 송백의 푸름과 같이 수백 년 동안 이어 내려온 가일 안동권문의 절의정신이라 하겠다.
고난을 딛고 일서선 가문의 역사
화산(花山) 권주(權柱, 1457~1505)는 입향조 권항(權恒, 1403~1461)의 손자이다. 1474년 18세 되던 해에 진사시 합격을 하고 1480년에는 문과급제를 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평해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사약이 내려짐으로써 숨을 거두었다. 차남 권전(權磌,1486~1521) 역시 1519년 기묘사화에 휘말려 파직을 당했으며, 1521년 신사무옥 때는 형장에서 죽음을 맞는 고초를 당했다. 이후 안동권문은 권주의 현손인 권경행(權景行,1583~1651)에 이르러 가일을 떠나 예천 용궁 오룡리로 옮겨갔다가 정곡(井谷) 권징(權징, 1636~1698)때에 가일로 다시 돌아온다.
권징의 아들 병곡(屛谷) 권구(權榘, 1672~1749)는 평생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보냈으나 학문과 인격이 뛰어나 안동 권문을 중흥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권구 역시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영조의 친국(親鞫)을 받는 고초를 겪었다. 이후 세상을 더욱 멀리하고 오직 학문과 수양에만 정진하는 생활을 보내다가 1749년 78세로 숨을 거두었다. 권구의 학문적 기풍을 이어받은 세 아들 제곡(霽谷) 권진(權縉,1697~1777)ㆍ소곡(巢谷) 권즙(權즙, 1704~1763)ㆍ수곡(樹谷) 권보(權보, 1709~1778)를 비롯하여 권진의 아들 가재(可齋) 權明佑(권명우,1722~1795)와 옥봉(玉峰) 권상우(權尙佑,1726~1792) 등이 이름을 크게 떨쳐 안동권문을 명문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런가 하면, 국망(國亡)의 위기에 처한 근세에는 권오설(權五卨,1897~1930)ㆍ권오상(權五尙,1900~1927)ㆍ권오직(權五稷, 1906~?)ㆍ권오옥(權五玉,1923~?) 등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침으로써 안동권문의 절의정신을 다시금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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