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전주, 군산 답사(2015.4.11~12)1

가까운 곳 여행/연수 중 답사

by ninesun 2015. 4. 15. 19:03

본문

중등테마별체험(역사)연수로 '과거와 현재의 만남(전주)와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찾아(군산)'라는 주제로 1박2일 답사를 다녀왔다. 좋은 날씨가 보탬을 더하고 즐겁고 신나는 연수가 되었다. 꽃들이 만발하여 답사의 흥을 더욱 돋워 주었다.

 

 

 

 

동고사(東固寺)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2호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이 절은 신라 헌강왕 2년(876)에 도선(道先)스님이 창건했으며, 전주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동고사라 칭했다 한다. 동고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헌종 10년(1844)에 허주(虛舟)스님이 다시 짓고, 그 후 영담(暎潭) 스님이 1946년에 대웅전 등을 새로 지어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신라 경순왕의 둘째 왕자가 범공(梵空)이란 이름의 스님이 되어, 도를 닦으며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랬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동고산성(東固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제44호

동고산성은 행정구역상 전주시 완산구 교동과 대성동이 접한 산줄기를 따라 성벽이 형성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1,712m이며, 동서방향으로 314m, 남북방향으로 256m에 이른다. 그 동안 발굴조사를 통하여 산성 내부에는 주건물터를 비롯하여 약 13개소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주건물터에서는 ‘전주성(全州城)’명의 막새기와 등이 출토되어 900년에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던 견훤왕이 쌓은 산성으로 밝혀졌다.

 

 

 

 

 

 

 

 

 

 

 

 

 

 

 

 

 

 

경기전 정전

보물 제1578호

경기전정전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초상활를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태종10년(1410)에 세웠다. 태조의 초상화를 보관하는 건물은 원래 개성ㆍ영흥ㆍ전주ㆍ경주ㆍ평양 등 다섯 곳에 있었는데, 경기전 정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 경기전정전도 정유재란(1597)때 불탔으나, 광해군6년(1614)에 다시 세웠으며, 회랑을 두어 최고의 사당임을 나타내었다. 경기전 입구에는 말에서 내리는 속임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 내삼문, 외삼문 그리고 초상화를 모신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조어진(太祖御眞)

국보 제317호

정전의 한가운데 감실을 두고 여기에 태조어진을 모셔놓고 있다. 청룡포를 입고 있는 전신상 어진으로 건국자의 위엄이 서려 있다. 1872년 고종9년에 새로 모사한 어진이며, 구보은 초상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항아리에 담아 진전 북쪽에 묻었다. 태조어진을 봉안한 감실 안에는 습기와 냄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기 위해 부용향을 담은 붉은색의 향주머니를 넣어 두었다. 감실 앞쪽에 어진을 호위하는 운검 한쌍을 세워두었으며, 정전 좌우편으로는 용선, 봉선, 청개 등 의장물을 배치하였다.

 

전주사고(全州史庫)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9)부터 1413년(태종13)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세종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ㆍ정종ㆍ태종의 3조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는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27)에 디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ㆍ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춘추관ㆍ충주ㆍ성주의 3사고의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614책 47권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과 실록의 보존

조선왕조실록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태인지방 선비 손홍록, 안의를 비롯해 무사 김홍무, 수복 한춘 등 전라도 사람들의 죽음을 불사한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은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고, 계속해서 호남지방 침공이 예상되자 내장산을 떠나 아산으로 옮겼다 이후 실록은 해주로 옮겨졌고, 임진왜란의 전황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1595년에 실록을 강화도로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실록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존하였다. 실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영변부 객사를 거쳐 1603년 강화도로 옮겼다.

조경묘(肇慶廟)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한은 신라 때 「사공(司公, 도성을 쌓고 고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한 벼슬)」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그 부인은 경주 김씨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대 후손이다. 조명묘는 조선 영조47년(1771)에 세워졌으며, 영조가 세손(정조)으로 하여금 쓰도록 한,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봉안했다. 철종5년(1854)에 경기전과 함께 보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