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교육연수원에서 실시하는 테마별맞춤형현장체험연수(문화예술탐방3기) 과정에 신청하여 경주 남산 답사에 떠나는 날이 아침부터 비가 계속내리고 있었다. 안동을 출발하여 구미에있는 경북교육연수원에 도착하는 시간내내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어서 오늘 산행은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구미서 경주 교육문화회관까지 가서 기다리고 있는 연수생들과 합류하여 삼릉주차장에 도착하였고 여기가 오늘의 서남산 답사 출발점이 되었다. 일정 순서는 배동 삼존불상-삼릉-마애관음보살상입상-목없는 석불좌상-선각육존불-선각마애불-석가여래좌상-상선암마애대불-상사바위-용장사지3층석탑-마애여래좌상-삼륜대좌불-용장사지-절골약사여래좌상-용장리주차장-경주교육문화회관에서 석식 후 특강은 '삼국유사와 경주이야기'를 손수협강사님께서 재미있게 하시고 대금 연주도 들을 수 있었어 매우 좋았다. 아쉬운 것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려서 암석으로돈 산길이 무척 미끄러웠고, 한분의 선생님이 미끄러져 계곡으로 추락하여 왼팔에 골절을 입는 사고도 있었다. 산행은 조금이라도 방심은 금물이고, 산행시 등산화는 필수인 것이다.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慶州 拜洞 石造如來三尊立像)
보물 제63호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석조삼존불입상이다. 경주 배동 선방사터에서 흩어져 묻힌 채 각각 발견되었으므로 처음부터 삼존불의 형태였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다만 1923년에 발굴할 당시 전체적인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지금의 자리에 모아서 나란히 세운 것이다.
중앙의 본존불상 높이는 2.66m, 좌우 협시상의 높이는 2.3m이다. 가운데 위치한 본존불은 육계(상투모양의 머리 묶음)가 이중으로 되어 있다. 목이 거의 없고 몸의 굴곡도 찾아볼 수 없다. 좌우의 협시보살 중 오른편은 이중으로 된 연꽃 대좌에 올라서 있고 보주(구슬 장식)를 길게 늘어뜨렸으며 광배(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가 화려하다. 왼쪽 보살은 꾸밈없이 수수하고 단정한 모습이다.
풍화작용으로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비각을 세우고 그 안에 삼존불을 봉안했기에 낮과 밤, 기후에 따라 불상의 표정이 바뀐다.
상세설명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표현하고 있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아이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오른쪽의 보살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조각솜씨가 뛰어난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에서 옮김]
배리 삼릉(拜里 三稜)
사적 제219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3-1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렬식 돌방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耶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三稜溪谷 磨崖觀音菩薩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2-6
이 불상은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으며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되어있다.
풍만한 얼굴에 머리 위에는 삼면보관(寶冠)을 썼는데, 앞에 작은 불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 불상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입술에는 붉은색이 아직 남아 있으며 연꽃으로 된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걸이를 하고 허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양 다리에 각각 U자 모양으로 드리우고 있다.
왼손은 정병[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올려 손가락을 꼬부려 밖으로 향하고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三稜溪 石造如來坐像)
계곡 어귀에 3개의 능이 있어 삼릉계라 하는데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冷谷)이라고 부른다. 이 계곡에는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으며, 금오봉 정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쪼 땅 속에서 머리(佛頭)가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裙衣)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복식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으로 평가된다.
왼쪽 산등성이 바위 벼랑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져 있고, 위쪽으로 오르다 보면 선각의 여섯 부처님과 마애여래좌상, 석가여래좌상, 그리고 남산에서 좌불로는 가장 큰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등 귀중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三稜溪谷 線刻六尊佛)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2-6
이 불상은 남산에서는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 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臺座)에 앉아 있다. 머리 둘레에 두광(頭光)만 새기고 몸 둘레의 신광(身光)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꿇어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菩薩像)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고 한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法堂)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三陵溪谷 線刻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2-6
이 불상은 높이 10m 가량 되는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위쪽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걸쳐 있다. 얼굴 부분은 돋을새김을 하고 몸은 얕은 돋을새김인데, 나머지는 큼직막하고 넓적하게 표혆고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을 크게 새겼는데 머리와 구분이 없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쳤으며 양손의 손목까지 덮고 있다. 왼손은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여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하여 왼손과 오른손이 마주하게 하였다. 바위 속에서 얼굴만 내민 듯한 점이 특이하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삼릉계 석불좌상(三稜溪 石佛坐像)
보물 제666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2-6
남산의 삼릉계곡 중부능선쯤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이다.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다.
이 불상의 상호(相好)는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 뺨과 코, 입 등 대부분을 복원하였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袈裟)는 왼쪽 어깨에만 두르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된 편단우견(偏袒右肩)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 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강이에서 발목으로 옷주름이 미스듬히 흐르고 있다.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새겨진 화염문(火焰紋)과 당초문(唐草紋) 등으로 보아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蓮花座)는 상대(上臺)에 앙련(仰蓮)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中臺)에는 면마다 안상(眼象)을 두었으나, 하대(下臺)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수법, 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주름 등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불상의 얼굴과 광배 등이 크게 파손된 상태였으나 2007~2008년 경주시의 의뢰로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ㆍ정비하였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三稜溪谷 磨崖釋迦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2-6
이 불상은 남산의 북쪽 금오봉(金鰲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의 남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광배(光背)로 삼았는데 깎아내다가 그만둔 듯 거칠다. 높이 7m로 냉골[三稜溪]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고 남산의 북봉인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있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하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가슴부분의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었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양 다리의 발 표현과 연꽃대좌가 아주 특이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상사바위(想思岩)
“상사바위는 금오산에 있다. 그 크기가 백여 발이나 되는데 그 생김새가 가파르게 솟아 있어 오르기가 어렵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위하고 빌면 병이 낫는다” “산아당(産兒堂)은 금오산에 있는데 아기를 낳는 모습을 돌에 새겨놓았다. 신라 때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전하는데 가위와 칼자국이 남아있다”
위의 글은 [동경잡기]에 실려 있는 상사바위에 대한 기록이다. 상사바위는 높이가 약 13m, 길이가 약25m 가량 되는 큰 바위로 이 바위를 서편에서 보면 냉골 여울에 뿌리 내리고 수십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첨탑처럼 보이고 동쪽에서 보면 산등성이 위에 직사각형으로 육중하게 솟아 있어 염라대왕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험상궂은 상이다.
바위 중간쯤에 가로 파인 틈에 돌을 던져 그 곳에 얹히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던진 돌이 떨어지면 바위신이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상사바위의 남쪽편에 아기를 낳는 듯 한 갈라진 바위인 “산아당”의 모습도 볼 수 있다.[경주국립공원]
용장사곡 삼층석탑(茸長寺谷 三層石塔)
보물 제186호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1
용장사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신화, 金鰲神話』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몇 군데의 석축(石築)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용장사(茸長寺)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층급받침이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탑의 높이는 4.5m 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에 맞닿은 듯이 높게 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인다. 바위 위에 세운 석탑으로서 통일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茸長寺址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913호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1-1
용장사는 조선 세조(世祖) 때 김시습(金時習)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지은 곳이다. 이곳 능선 위에 용장사터 3층석탑이 있고, 이 마애불 바로 앞에는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 있다.
이 불상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조각되었는데, 머리 둘레의 두광(頭光)과 몸 둘레의 신광(身光)은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얼굴은 풍만하고 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을 표현하였으며, 귀는 눈에서 목까지 상당히 길게 표현하였으며, 귀는 눈에서 목까지 상당히 길게 표현하였다. 목에는 3개의 선으로 표현된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옷의 주름선은 앏고 촘촘한 평행선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는데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를 동시에 걸치고 있다. 가슴부분에도 역시 속옷을 비스듬한 모양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왼쪽 어깨 바깥부분에 글씨가 있는데 “태평 2년 8월(太平二年八月)”에 무엇인가를 하였다는 내용인데, 마멸이 심하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茸長寺谷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87호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 1-1
이 불상은 용장사터에 있는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으로 추정되는 석불 좌상이다. 삼륜대좌 위에 모셔진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1932년 일본인들에 의해 복원된 것으로 머리 부분은 없어졌다. 손과 몸체 일부가 남아 있는데 대좌에 비해서 불상은 작은 편이다. 목에는 3줄의 뚜렷한 삼도(三道)가 있고 어깨는 넓지 않고 다소 좁은 편이나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좌측 어깨에는 매듭지어진 가사끈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석불은 특이한 둥근 형태 대좌 뿐 아니라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준다. 제작시기는 조각 양식으로 보아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용장사는 신라 유가종(瑜伽宗)의 대덕 태현(太賢)이 주지로 있었으며,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은거하며 『금오신화, 金鰲神話』를 집필한 곳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용장사터(茸長寺址)
금오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가장 큰 봉우리를 주산(主山)으로 삼아 용장사 절터가 자리하고 있다. ‘용장사(茸長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 신라,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함께 출토되어 천년전의 역사가 최근까지 이어져 유서 깊은 절이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거대한 돌축대들은 이 절의 규모가 얼마나 컷던가를 말해주고 있다. 앞을 내다보면 은적골 절터와 삼각산이 발아래 보이고, 멀리 고위산이 드높게 보인다. 건물터로 추정되는 이곳에서 동북방향으로 바라보면 위쪽에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 등이 있으며 그 정상에는 삼층석탑이 우뚝하게 솟아 마치 도솔천을 연상케 한다.
용장산는 통일신라시대 대현(大賢)스님이 법상종을 개창했던 절이며, 조선시대의 대학자이자 스님인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다. 김시습은 단종이 폐위되자 세상을 버리고 출가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5편의 이야기를 짓고 금오산의 이름을 빌어 『금오신화, 金鰲神話』라 하였다.(1997년[불기 2541년] 6월 29일 - 청정운동추진위원회, 신라문화원이 세우다)
절골 약사여래좌상(寺谷 藥師如來坐像)
이곳은 용장계의 절골로 불려지는데 몇 단으로 되어있는 돌축대로 보아 당시 웅장한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유물로는 법당자리에 서 있는 약사여래좌상과 석탑의 일부가 남아 있다.
약사여래좌상(높이 121cm)의 머리는 찾지 못했으나 몸체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가사는 양어깨에 걸친 통견이며 옷주름은 얇고 아름다운데 왼손에는 약그릇을 들었으며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1940년 조사된 보고서에 의하면 이 불상 옆에 직사각형의 연화대좌가 묻혀 있는데 복련 하대석 위에 직사각형의 중대석을 얹고 그 위에 앙련대석을 올렸다. 중대석의 4면에 새긴 힘찬 사천왕상은 아직도 땅 속에 묻혀있고, 탑재의 반쪽은 100m 아래에 있다. 당시 이 불상대좌 앞에서 출토된 소형 금동여래좌상(높이 3.2cm)은 지금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乍晴乍雨
乍晴乍雨雨還晴(사청사우우환청)
잠깐 개었다 비 내리고 내렸다가 도로 개이니
天道猶然況世情(천도유연황세정)
하늘의 이치도 이러한데 하물며 세상 인심이야
譽我便應還毁我(예아변응환훼아)
나를 칭찬하다 곧 도리어 나를 헐뜯고
逃名却自爲求名(도명각자위구명)
명예를 마다더니 도리어 명예를 구하게 되네
花開花謝春何管(화개화사춘하관)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을 봄이 어찌 하리오
雲去雲來山不爭(운거운래산불쟁)
구름이 오고 구름이 가는 것을 산은 다투질 않네
寄語世人須記認(기어세인수기인)
세상 사람에게 말하노니 꼭 새겨두기를,
取歡無處得平生(취환무처득평생)
기쁨을 취한들 평생 누릴 곳은 없다는 것을
전주, 군산 답사(2015.4.11~12)1 (0) | 2015.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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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답사 둘째날(2012.10.28) (0) | 2012.10.30 |
대구 답사(2012.1.5) (0) | 2012.01.08 |
거제도포로수용소(2011.1.6) (0) | 2011.01.13 |
서울 답사3(09.7.29) (0) | 2009.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