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실시한 근현대사 연수에서 대구 답사를 하였다. 매년 겨울방학에 실시하는 연수에 참석하면서 근현대사의 새로운 역사를 접하고 공부할 수 있게된 것이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대구를 자주 가지만 역사의 도시임을 답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에 대구에 올때는 더욱 관심과 공부를 더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근대 路의 여행
진골목 jin-golmok
진골목은 ‘긴골목’의 경상도 말씨로 ‘길다’를 의미하는 ‘질-다’에서 기원한다. 대구읍성의 남문이 있었던 구 대남한의원 사거리를 통과해 종로로 50m 정도 들어서면 우측편으로 길게 뻗어 들어가는 골목이다. 감영시대에서 해방 전까지 이 골목은 대구토착세력이었던 달성서씨들의 집성촌이었다. 이 골목을 통하면 당시 군사ㆍ행정로였던 종로를 통하지 않고도 감영, 중영까지 갈 수 있었다. 진골목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으로는 경정(종로)→남정(남일동)→전정ㆍ상정(포정동)으로 이어졌었다. 해방 이후에도 재력가들과 기업인들의 거주지로 각광 받았다.
대구 토착지주 달성서씨 집성촌, 남일동 진골목
달성서씨들은 고려시대부터 대구에 정착한 지방 호족으로 조정에 헌납했던 달성 토성을 비롯 구암서원이 있었던 동산, 남산동, 계산동, 산격동 등 그들의 따을 밟지 않고선 영남대로를 지날 수 없을 정도였다.
진골목에서는 지주들이 모여 살았으며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시대 토지대장 기록에는 서씨들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10만석꾼으로 불리며 풍유를 즐겼던 석재 서병오, 한국인 최초의 무진회사였던 ‘조양무진’사장 서창규, 경상북도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 이인성과 함께 근대화단을 개척한 서병기, 서병직, 국채보상회 간부였던 서병규,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서상규와 김응섭, 고래등 같은 그의 집채가 그대로 남아있는 서병원 등 헤아리 수 없을 정도다. 대구출신 독립운동가 이시영의 사돈이 진골목에 서씨 재력가로 소문나있어 그이 아들을 애국단에 가입시켜 자발적으로 군자금을 희사받기로 했으나 끝내 모른 채 했다고 한다. 이시영은 그의 집에 아들을 앞세우고 권총으로 위협하며 침입했다가 정체만 드러낸 채 실패하고 2년간 옥고를 치룬 사건도 있었다. 달성서씨 이외에 동산 99칸 집의 주인인 인동출신 거부 장길상, 장직상 형제는 물론 한국인이 설립한 대구 최초의 은행인 ‘대구은행(경상합동은행)’ 설립자인 재려가 정재학, 해방 이후 코오롱을 창업한 이원만, 약전골목에서 당재와 초재 거래를 하며 벼락부자가 된 김성달 1971년 창업하여 연간 2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평화클러치(현 평화발레오) 창업자 김상영, 1973년 문을 연 로얄호텔 사장 등 1970년대까지 재력가와 기업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거주지였다.
근대상업도시, 대구
대구는 상업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었다. 평양, 강경시장과 함께 전국 3대 시장으로 유명한 서문시장은 「대구부읍지」에 ‘대구읍장’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그 명칭은 읍성의 서문 밖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1923년 천왕당 못이 있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금까지도 대구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전국 최대의 약재시장이었던 약령시는 1658(효종9)년 경상도 관찰사 임의백에 의해 봄, 가을에 객사 주변에서 열렸으나 1908년 객사가 헐림에 따라 지금의 남성로 일대로 이동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약령시 춘시가 폐지되었으나 1923년 약령시 진흥동맹회가 조직되어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광복 후 다시 봄, 가을에 열리다가 상설시장으로 변하였다.
근대역사박물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대구지점
조선식산은행은 일제 식민지 경제정책에서 금융 지배를 담당했던 주요 핵심 기관이었다. 일제는 1918년 10월 「조선식산은행령」에 따라 한성농공은행 등 지방 농공은행 6곳을 강제 합병하고 “자본의 충실”을 조선식산은행의 설립 목적으로 내세웠다.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을 일제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한 산미증식계획에서 자금 공급을 담당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채권 발행과 강제 저축을 통해 조선의 자금을 흡수하여 일제의 군수산업에 자금을 공급하였으며, 1942년에는 일제 전시금고의 조선융자업무 대리기관으로 지정되었다. 광복 후에는 한국식산은행으로 개칭되었다가 1945년 한국산업은행에 합병되었다.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되자 경상농공은행이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개편되었다. 1938년 말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은 조선은행 대구지점과 함께 지역은행 총 대출역의 80%를 차지하면서 지방 금융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더욱이 대출의 용도를 대부분 산업자금 공급으로 한정함으로써 대구ㆍ경북지역의 농상업 전반을 금융으로 지배하였다.
전통도시 대구의 해체와 재구성
대구는 지리적으로 영남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하였던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다. 신라시대인 689(신문왕9년)년에는 달구벌(대구)로 천도를 계획한 일도 있었으며, 조선시대인 1601(선조34)년 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구사람들은 1830년대 천주교 전래 이후 근대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하였고, 1900년대 초부터는 일본인들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근대 문물에 대한 수용과 배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주적인 근대화를 모색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지방행정기관의 중심이었던 경상감영과 대구라는 도시의 형체를 이루고 있던 대구읍성의 훼철은 전통 도시 대구의 해체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력거
인력거는 1890년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는데 주로 관리, 부자, 기생 등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었다. 대구에서는 역전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1920년대 당시 요금은 부내 5정 이내 30전 내외(쌀 한되 약 39전)로 매우 비싼 편이었다. 인력거는 주인의 심한 폭압과 멸시를 참아가며 끌어야했던 가난한 한국인들의 생계수단 중 하나였다.
박문수 초상화(朴文秀 肖像畵) 100×165cm 조선후기 천안박물관 소장
박문수(1691~1756)는 조선영조때의 문신으로 1723년 병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로 활약하면서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던 인물이다. 이 초상화는 38세의 젊은 시절 모습을 그린 것으로 공신상 초상화의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호피가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은 두 손을 맞잡고 소매 속에 넣은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발을 받침대 위에 팔자로 얹어 놓았다. 초록색 관복을 입고 가슴에는 두 마리의 학과 구름무늬를 수놓은 흉배를 하고 있으며 금장식의 각대를 두르고 있다.
민광승 초상화(閔光升 肖像畵) 75×126.5cm 조선후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민광승은 1800년(정조24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된 인물이다. 1801년(순조1년) 하동, 창원에서의 괘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이 초상화로 보아 풍채가 좋고 얼굴이 강단있게 보이는 등 전형적인 무인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초상화는 정면으로 바라보는 모습이며 다소 경직되게 표현되었다. 호랑이를 수 놓은 흉배를 가슴에 대었고, 호랑이 가죽을 의자에 깔고 앉아 있다.
관리임용과 교지
조선의 관직제도는 품계에 맞추어 운영되었다. 품계는 쉽게 말하면 등급이다. 정1품에서 종9품까지 있었다. 문관과 무관 이외에도 종친과 내명부, 외명부 등에게도 품계가 주어졌다. 조선의 관원은 정3품을 기점으로 당상관과 당하관으로 나누어지며 6품을 기점으로 참상관과 참하관으로 나누어졌다. 당상관은 국왕과 함께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였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과 함께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장관에 버금간다고 하겠다. 참상관은 6품 이상이며, 참상관이 되면 비로소 지방의 목민관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오늘날 행정무 공직자 1급을 ‘관리관’이라 칭하듯이 조선의 정1품은 ‘대광보국숭록대부’라 하였다. 그리고 정5품은 ‘통덕랑’이라 하였다. 즉 4품 이상의 관원을 ‘00대부’라 하였으며 5품 이하를 ‘00랑’이라 하였다. 문무관의 배우자인 외명부에게도 정3품 당상관이상에게만 ‘부인’이란 품계를 받을 수 있어 ‘부인’은 요즘처럼 쉽게 사용하는 호칭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대감은 정2품 판서 이상의 고급관료에게만 사용하였고, 영감은 3-4품 관료에게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당상관의 경우 100자리도 안될 정도로 관직의 수가 적었는데 겸직까지 하였으므로 그 수는 더욱 적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리 다툼이 심하였으며 높은 품계를 가진 자가 그에 상응하는 관직에 제수받지 못하고 낮은 관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행수법이 생겨났다. 즉 품계는 높은데 낮은 관직을 받으면 ‘행’을, 품계는 낮은데 높은 관직을 받으면‘수’를 사용하였다. 인사발령장인 교지에는 행수법을 적용한 예가 많다. 이는 조선후기로 갈수록 품계의 인플레 현상이 심하였음을 반영한다.
대구감영의 변화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체제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각 도에 관찰사(감사)를 파견하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집무하던 관청으로 오늘날의 도청에 해당한다. 경상감영은 조선 개국 이래 경주, 상주, 칠곡, 안동을 거쳐 1601(선조34)년 대구에 정착하여 1895(고종32)년 지방제도가 개편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과 관사인 징청각(澄淸閣) 등의 시설은 감영의 대구 정착 이후에 생겨났다. 그러나 1906년 대한제국의 국권 침탈을 목적으로 일제 통감부의 하부조직인 대구이시청의 개설로 선화당과 징청각의 건물은 근대식 사무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그 후 1909년 읍성 안에 십자 도로가 개통되면서 두 건물은 경상북도 청사의 부속 사무실이 되었고, 감영 내의 다른 건물들도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대구의 역사와 전통의 상징이었던 대구읍성의 훼철
대구읍성은 1590(선조23)년에 토성으로 조성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1736(영조12)년에 관찰사 민응수가 이를 다시 석성으로 쌓았다. 축조 당시 읍성의 규모는 둘레가 2,124보(약 2.68km)이고, 높이는 서남쪽이 18척(3.78m), 동북쪽이 17척(3.57m)이었으며, 성의 동ㆍ서ㆍ남ㆍ북에 4개의 정문과 동ㆍ서에 2개의 소문이 있었다. 1870(고종7)년 관찰사 김세호가 대원군의 명을 받아 중수한 바 있다. 1888년~1896년까지 조선을 방문하였던 프랑스의 탐험가 샤를 바라(Charles Varat)는 「조선기행」에서 대구읍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둥근 길을 따라 쌓여진 그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다. 사방 성벽의 각면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그 성문에 있는 정자 안에 들어가면 과거 역사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그림과 조각들이 있다. 그곳에 올라 나는 가을 햇볓아래 찬란한 색채를 발하며 전원 사이를 굽이치는 금호강의 낙조를 감상했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기념물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1906년 당시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박중양은 대한제국 정부의 허가도 없이 일본인의 요구대로 읍성을 헐기 시작하여 1907년 4월 완전히 철거하고 말았다. 이때 나온 흙과 돌은 주로 오늘날의 중구 도원동 일대를 비롯하여 동문 밖의 저지대를 매립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조경석이나 건물의 주출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전통적 성곽되시였던 대구의 모습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선화당(宣化堂)
대구유형문화재 제1호
선화당은 경상감영의 정청으로서 대구에 경상감영이 정착하게 된 선조34년(1601) 이곳에 세운 건물이다. 그 후 현종11년(1670) 영조6년(1730) 순조6년(1806) 세차례의 큰 화재로 불탔으나 순조7년(1807)에 새로 지었고, 1970년에 중수하였다.
이 건물은 현존하는 관아 건축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귀한 가치를 지닌다.
측우대
김원석 선생님의 해설 장면
대구의 민족운동은 대구지역 뿐만 아니라 경북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식민지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중심축을 이루었다. 1910년대 민족운동은 대한광복회와 조선국권회복단(달성친목회) 등이 주축이 되었으며, 이는 1919년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또한 각계각층의 민중운동,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임시정부 활동, 유림단의 파리장서운동, 장진홍의 조선은행 폭탄 사건과 이종암 사건 같은 의열투쟁이 전개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청년운동과 노동운도을 비롯한 여성운동, 형평운동, 학생운동 등이 민족운동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또한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신간회 대구지회와 근우회 대구지회가 설립되어 대구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1930년대 이후 대구에서는 비밀결사가 결성되어 반일민족운동과 전쟁반대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1939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왜관 학생항일 사건, 문예부ㆍ연구회ㆍ다혁당 등 비밀결사운동을 펼쳤으며, 1943년에는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이 비밀결사 태극단(T.K.D)을 결성하여 독립투쟁을 모색하기도 했다.
점심으로 해물전골을 맛있게 먹으면서...
중구청에서 나오신 문화재 해설사님께서 상세한 해설을 위해 추운 날씨에도 열강을 해주신다.
대구, 대한민국 문학의 금자탑을 세우다.
일제강점기 대구의 문학계에서는 서정과 현실주의에서 저항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 활동이 이루어졌다. 시 부문에서 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식민지 민족의 현실을 작품으로 승화시켰고, 백기만은「산촌 모경」등의 작품을 통해 신선한 감각과 신비한 감성의 시를 썼다. 이장희는 「봄은 고양이로다」등 탁월한 작품을 남겨 한국시 분야에 있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며, 시조에서는 이호우가 「달밤」등을 발표하며 현대시조의 지평을 열었다. 소설에서는 현진건이 식민지 현실의 소시민을 독자층으로 하여 「운수 좋은 날」등을 발표하며 한국 리얼리즘의 개척자로 불렸다. 아동문학에서는 윤복진이 동요「별 따러 가세」로 작품 활동을 시작, 향토 아동문학의 진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외 시에서는 이육사. 오일도, 박목월, 이설주, 이효상, 이윤수, 조지훈, 시조에서는 조애영, 림여창, 소설에서는 백신애, 장덕조, 아동문학의 이응창, 김성도, 박영종 등이 활동하면서 대구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우현서루(友弦書樓) 옛터
소남 이일우(경주, 1870~1936, 민족시인 이상화 백부)는 나라 안팎이 급변하던 정세를 대처하기 위해 당시 대구의 선각토호인 부친 금남 이동진선생의 뜻을 이어 1905년 이곳에 우현서루라는 의숙을 설립하셨다. 우현서루의 의미는 “현고를 벗 삼아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고 의기를 기르는 곳”이란 내용이다. 우현서루에 만권 가까운 동서고금의 서적을 수입ㆍ비치하고, 해마다 20~30명씩(1년코스) 젊은이들을 뽑아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공부시켰으며 우현서루에 발을 들여놓으면 곧 개화ㆍ진보ㆍ자강ㆍ독립운동의 구국전선에 퉇신하게 되었고 나라를 향한 애국심도 불타올랐다.
우현서루는 구국 운동 발원지로써 상당히 깊은 뿌리를 내렸지만 일제 탄압에 의해 7년 만에 강제폐쇄된 반면에 이곳에서 수학한 팔도 열ㆍ지사들의 맥락이 이어졌으며 애국지사만 150명이 넘었다. 상해임정의 대통령 박은식, 초대국무령 이동휘,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 장지필, 권일제, 여운향, 김성수 등이 필두를 빛냈다. 특히 일제궁서의 이중교 폭탄사건의 주인공 김지섭 지사는 정통 우현출신이다.
우현서루가 폐쇄된 후 강의원(講義院), 신여성운동을 위한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어 일제상품 불매운동을 비롯한 금연ㆍ국채보상운동 등 민족성 계몽운동을 실천하였고, 우현서루 자리에 대륜 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교남학교가 설립된 유서 깊은 곳이다.
국채보상운동발상지 광문사 터
1907년 1월 29일 광문회 회원들은 일본에 진 나라 빚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담배를 끊기로 결의했다. 2년여 동안 불타오른 국채보상운동의 첫불길이다.
삼성, 대구에서 성장하다.
1938년 3월 1일 이병철(1910~1987)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의 수동(지금의 인교동61-1)에 삼성상회를 설릷하였다. 삼성상회는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의 능금, 포항의 건어물 등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였다. 이병철은 개업 1년 만에 일본인의 조선양조를 인수하는 등 대구 굴지의 사업가로 성장하였다. 사업은 순조롭게 신장되어 1941년 6월3일, 삼성상회를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등록, 근대적인 기업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1947년 5월 대구의 사업체는 간부직원들에게 일임하고 상경하여 이듬해 삼성물산을 설립하여 무역업에 나섰다. 그러나 6ㆍ25 전쟁때, 북한 인민군에게 재산을 몰수 당하고 대구로 내려왔다. 다행히 조선양조의 수입금ㄴ 3억원으로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다시 설립하였으며, 1954년 9월 15일, 대구에서 제일모직 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삼성그룹의 모태를 마련하였다.
관풍루(觀風樓)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3호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의 남쪽에 정문인 포정문(布政門)을 세우고 그 위에 문루(門樓)를 만들어 관풍루라 하였다. 1906년대 구읍성(邑城)이 헐리면서 지금의 달성공원 안으로 옮겼으며, 1970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당시 관풍루에는 큰북, 종, 피리, 나팔 등의 풍악기구를 준비해 놓고 매일 밤 10시에 문을 닫고, 새벽 5시에 문을 여는 풍악을 울렸다고 한다. 이 풍악소리에 맞춰 동서남북의 4개 성문을 열고 닫는 의식절차를 엄숙히 행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누에서 30걸음쯤 남쪽에 ‘절도사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비석’[節度使以下皆下馬碑]이 있어 관찰사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면 말에서 내려 걸어오도록 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께서 대구를 방문하여 기념식수한 것이라네요.
강윤정학예연구실장님께서 대구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강의를 하는 모습
학생이 서있는 옆의 비에 3.1운동의 기념비가 있다고....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
전국 담장 허물기의 첫 행사로 철거한 본원의 유서 깊은 정문 및 중문 기둥과 담장을 여기에 옮겨다 세우고, 그 위에 본원의 초창기에 개척한 수많은 교회의 종들 중 하나를 올려놓았다. 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두 기둥은 환자를 돌보는 교직원들의 사랑의 손길을 , 보도에 놓은 다듬이돌들은 본원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디딤돌임을 상징한다.
선교사스윗즈(Switzer) 주택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194
이 주택은 1893년부터 대구를 찾아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1910년 경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07년(대구읍성 철거 때) 가져온 안산암의 성돌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았다. 지붕은 원래 한식기와로 이었으나 뒤에 함석으로 바꾸었다. 비록 지붕 재료 등의 일부가 바뀌었으나,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와 내부 구조는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대구의 초기 서양식 건물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사과나무 100년(학명: Malus domestica Borkh)
여기에 뿌리 내린 이 사과나무는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미국에서 들어온 한국 최초 서양 사과나무의 자손목으로서 동산의료원 역사를 말할 뿐 아니라 대구를 사과의 도시로 만든 의미있는 생명체이다.
초대병원장인 존슨박사(Woodbridge O. johnson 한국명 장인차)가 미국 의료선교사로 동산병원에 재임하면서 미국 미조리주에 있는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이곳에서 재배한 것이 대구 서양 사과나무의 효시이다.
선교사 챔니스(Chamness) 주택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424
이 건물은 1910년 경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거주하기 위해 지은 주택이다.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집은 남북쪽으로 약간 긴 네모 형태를 이루고 있다. 1층 서쪽 중앙에 있는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홀이 있고, 이 홀을 중심으로 거실ㆍ서재ㆍ부엌ㆍ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2층에는 계단실을 중심으로 좌ㆍ우측에 각각 침실을 두고 욕실ㆍ벽장 등의 부속공간을 마련했다. 1층 동남쪽에는 거실 등에서 이용할 수 있는 비교적 넓은 베란다를 시설하였다. 건물은 기초를 튼튼한 콘크리트로 하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미국식으로 쌓았다. 이러한 건물의 양식은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풍으로, 지금까지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하부의 석재들은 대구읍성 훼철시 가져다 쓴 것을 추정된다.
선교사블레어(Blair) 주택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424
이 건물은 1910년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주택이다. 2층인 이 집은 남ㆍ북쪽이 조금 더 긴 네모 형태를 이루고 있다. 1층의 서쪽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를 두고 현관 홀을 들어서면 바로 맞은편에2층으로 오르는 계단실이 있고, 그 오른쪽인 집의 중앙에 거실과 응접실이 앞뒤로 자리잡고 있다. 거실과 응접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침실ㆍ부엌ㆍ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2층에는 계단홀을 중심으로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고 현관 홀 위에는 늘 빛을 받아 들이는 선룸(Sun Room)을 설치했다.
건물은 기초와 자하실 부분을 튼튼한 콘크리트로 하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을 쌓았다. 이 집의 전체적인 모습은 같은 시기 미국에서 유행한 방갈로풍에 가까운 서양식 주택으로, 지금까지 당시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은혜정원
우리가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국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여기에 고이 잠들어 있다. 지금도 이 민족의 복음화와 번영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리라.
3ㆍ1운동길(3ㆍ1運動路)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폭발한 조선독립만세 운동은 대구에서는 3월 8일 오후에 일어났다. 이날 거사에 동참키로 한 많은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산병원 솔밭길을 이용하여 예정된 큰장안 강씨 소금집 앞으로 접근해 갔다. 그리하여 동산병원 언덕 소나무 숲은 대구 3ㆍ1운동 성공에 말없이 이바지 한 비밀 통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 옛날의 우거진 소나무 숲도 그 속에 있었던 오솔길도 다 사라지고 없다. 당시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애국학생들의 발자취도 땅에선 찾을 길 없다. 그러나 그글의 발자취는 땅 밑에서 큰 진동으로 남아 지금도 크게 숨쉬고 있다. 대구시는 3ㆍ1운동 84주년을 맞아 대구 3ㆍ1운동과 관계가 있는 동산병원 솔밭과 닿았던 이 길을 대구 3ㆍ1운동 길이라 이름지어 3ㆍ1운동정신을 후세에 기리전하고자 한다. 비록 이 길은 비좁고 보잘 것 없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이 일제의 침략과 수탈로 피폐해진 우리 민족의 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근대교육의 산실
대한제국 시기 대구에는 1899년에 설립된 대구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사립달성학교를 비롯하여 계성학교(1906년), 신명여학교(1907년) 등 종교계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민족교육과 계몽운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제는 교육쇄신을 구실로 사립학교를 탄압하면서, 대구공립보통학교(1905년), 덕산심상소학교(1906년) 등 공립학교와 일본인 전용학교를 설립하였다. 3ㆍ1운동 이후에는 소위 문화정치의 시행으로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에 치중하여 대구상업학교, 대구농림학교 등의 실업계 중등학교가 많이 설립되었다. 이후 대구사범학교(1923년)와 대구의학전문학교(1933년) 등과 같이 전문교육기관이 개교하였다.
한편, 일제의 감시와 탄압 하에서도 대구청년활동(신우동맹) 및 동맹휴학과 항일시위 등 교육현장에서의 학생반일운동은 계속되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비밀결사 활동과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 활동 등은 국권회복을 위한 조직적인 항일운동이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대구지역 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과 그 정신은 오늘날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을 이어오는 저력이 되었다.
계산동 성당
사적 제290호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71
이 건물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설계는 프랑스의 로베르 신부가 하였고, 서울 명동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하여 1902년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1911년에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이는 등의 증축을 하여 1918년 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평면은 라틴십자형이고, 서쪽 정면에 세운 2개의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을 세웠으며, 앞면과 양쪽에는 장미창으로 장식하였다. 당시 대구에 처음 세워진 서양식의 건물이며 현존하는 1900년대의 성당건축물로 유일한 것이어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인성 나무(李仁星 木)
위치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 2가 71(계산천주교회내)
수종 : 감나무
나무와 연관되는 인물 : 미술과 이인성
이인성(1912~1950)은 우리 대구 출신의 천재화가로 수창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촌락의 풍경)이라는 수채화를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하였다. 그후 1929년부터 1944년까지 16년 동안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14회 선전에서는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또한 1998년 모 미술전문잡지사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평론가 13명을 대상으로 [한국근대유화베스트10]을 조사한 결과 1위로 선정되었으며, 작가 인기도 조사에서도 1위를 차지 하였다. 대구시는 대구를 빛낸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인성 미술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그 해의 가장 우수한 화가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100년 정도된 감나무로 1930년대에 그린 [계산동 성당]의 배경이 된 나무 중 한 그루이므로 “이인성 나무”라고 이름 지었다.
태극기(Taegeukgi, The Korean National Flag)
서울 진관사 칠성전 해체, 복원 공사중 발견된 태극기, 1919년 3ㆍ1운동 전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 디자인, 현재 부착된 태극기의 건곤감리(乾坤坎離) 위치와 태극문양의 모양, 방향 등은 현재의 태극기와 상이함.
이상화(李相和)
- 아호 무량(無量), 상화(想華), 상화(尙火), 백아(白啞)
- 1901년 대구시 중구 서문로 출생(1901~1943)
- 1919년 대구에서 3ㆍ1운동 거사 모임 참여
- 1928년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사건’에 연루 대구경찰서 구금
- 1943년 계산동 고택에서 숙환으로 운명
- 작품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시로, 역천
서상돈(徐相燉)
- 경북 상주 출생(1850~1913)
-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 전개
- 국채보상 취지서를 작성 발표
-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 설치
1907년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이천만 동포로 하여금 석달동안 담배를 끊어서라도 국채를 갚아 국권을 사수하고 민족경제를 지키고자 발의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민족운동가
이상화 고택
이상화 고택과 마주보고 있는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 대구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서상돈, 김광제 등이 주축이 되어 대구광문사에서 국채 1,300만원(당시 정부 1년 예산 정도)을 갚자는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16명으로 구성된 발기인들은 북후정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군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를 설치하였다.
이후 전국민의 호응으로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가 설치되고, 『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ㆍ『만세보』등 각종 신문의 후원이 줄을 이었다. 같은 해 4월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國債報償志願金總合所)가 설치되고 한규설ㆍ양기탁 등이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 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명이고, 5월까지의 모인 보상금액은 18만 6천원을 상회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총무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고, 『대한매일신보』경영자인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을 추방하는 등의 방법으로 교묘하게 탄압을 하였다. 또 친일단체 일진회의 공격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1907년 8월22일 통감부 조사결과 전국적으로 운동이 확산되었으며 의연금은 272,689원이 모금되었다.)
그러나 외세 침략의 원인이 외채에 있다고 보고 이를 갚아 자주성을 회복하자는 획기적인 발상을 한 대구의 정신은 이후 대구 독립만세운동을 비롯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2ㆍ28민주화운동 등에서 보여주듯 오늘날까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서상돈 고택을 끝으로 답사를 끝맺으면서 ...
2ㆍ28 민주 운동
1960년 2월 28일,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한국 최초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전국민의 가슴에 민주화의 불길을 지폈고, 마침내 4ㆍ19혁명으로 대단원의 막을 올림으로써 한국 민주헌정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2ㆍ28 민주 운동은 3ㆍ15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2월 28일로 예정된 민주당 강연호에 학생들의 참여를 저지할 목적으로 자유당 정권이 대구시내 공립고등학교(경북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고, 대구공고, 대구상고, 대구농고, 대구여고 등) 학생들의 일요등교를 강요한 것이 발단이었다. 2월 25일, 학교당국은 권력기관의 지시에 따라 학사일정에도 없던 온갖 핑계로 학생들에게 등교를 강요했고, 2월 28일, 학생들은 이것이 자유당의 부정선거 흉계임을 간파하고 학원마저 정치도구화하려는 불의에 항거했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벌인 민주 민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시위였다.
2월 28일 일요등교 강요에 대한 구실은 학교별로 영화감상, 토끼사냥, 운동회, 졸업식 연습, 임시시험 등이었다. 경북고교생들은 이를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로 규정한 결의문을 낭독하고 경상북도 청사, 대구시 청사, 자유당 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 독재와 부정의 심장부를 돌며 그 부당성을 규탄했다. 대구 고교생들은 명덕로터리와 중앙로로, 경북여고생들은 수성교방향으로 시위를 벌였고, 경북대사대부속고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의 학생들도 교내 농성 등의 집단행동으로 불의에 항거하였으며, 대구시민들도 학생들의 의거에 호응했다. 학생들이 외친 구호는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등이었다. 이들은 조국이 가난한 약소국에서 벗어나 훌륭한 민주국가가 되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박정희와 대구
박정희는 1932년 4월 1일 대구사범학교 제4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37년 3월 25일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의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 그는 잠시 일본군 장교가 되었으나 광복 후에 국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6ㆍ25 전쟁 당시 동인동의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중 계산동 성당에서 육영수 여사와 결혼하였고, 삼덕동에 신혼집을 차렸다. 이처럼 대구는 박정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대통령이 된 후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그 준공식을 대구공설운동장에서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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