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날씨는 맑고 시원한 공기가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상쾌한 날이었다. 일찍 아침을 먹고 동남산을 답사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어제의 거추장스러운 우위를 벗어버려서 그런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오늘 답사코스는 경주교육문화회관-불곡주차장-불곡 마애여래좌상-탑곡 마애불상군-보리사 마애석불-미륵곡 석조여래좌상-헌강왕릉-정강왕릉-서출지-중식-남산리3층석탑-염불사3층석탑- 칠불암-신선암마애불-통일전주차장-경주교육문화회관-구미-안동 도착으로 이어졌다.
이틀 동안 강행군으로 산행을 하였지만 보람있고 알찬 답사를 통한 연수였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참가하고 싶어졌다.
불곡 마애여래좌상(佛谷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198호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산56
이 불상은 남산 동쪽 기슭 한 바위에 자연암(自然巖)을 0.9m나 파내어 감실을 만든 후 조각한 여래좌상이다. 경주에서는 “할매부처”로 불린다.
머리부분은 깊은 돋을새김으로 되어있고 두건을 덮어쓴 것 같은데 귀 부분까지 덮여 있다. 얼굴은 약간 숙여져 있으며, 둥글둥글하게 조각하고 눈은 은행알처럼 두툼하게 나타내었다. 어깨는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고 옷은 양어깨에 걸친 통견(通肩)으로 하였다. 손은 옷 속에 넣어 표현되지 않았고 옷이 수직으로 흘러내려 사각형 대좌를 덮고 있다. 오른발만을 밖으로 드러내어 부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대좌를 덮은 옷(裳懸座)은 아랫단이 장막을 만들어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불상은 장창골 애기부처와 배리 삼존불과 함께 신라 석불로는 아주 이른 시기인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佛谷)라고 부르게 되었다.
탑곡 마애불상군(塔谷 磨崖佛像群)
보물 제201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9
이 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神印寺)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남쪽에 3층 석탑이 있어 ‘탑곡(塔谷)’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애조상군이라는 명칭은 높이 약 10m, 사방 둘레 약 30m의 바위와 주변의 바위면에 여러 상이 새겨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북쪽면에는 마주 선 9층 목탑과 7층 목탑 사이에 석가여래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탑앞에는 사자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동쪽면에는 가운데에 여래상이 새겨져 있고, 주위에는 비천상(飛天像), 승려상, 보살상(菩薩像), 인왕상(仁王像), 나무 등이 새겨져 있다.
남쪽면에는 삼존불이 정답게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여래상과 승려상이 새겨져 있다.
서쪽면에는 능수버들과 대나무 사이에 여래조상이 새겨져 있다.
이와같이 여러 상이 한자리에 새겨진 예는 보기 드문 일이며, 지금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총 34점의 도상이 확인되고 있다.
보리사 마애석불(菩提寺 磨崖石佛)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66-1
이 마애불은 망덕사터(望德寺址)를 비롯한 벌지지(伐知旨)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있다.
앞으로 약간 기운 바위면에 광배(光背) 형태로 바위면을 파내고 불상을 조각하여 상당히 얕은 돋을새김이 되었다. 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이 표현되고 얼굴은 두툼하고 세밀하게 하여 자비 넘치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귀는 길게 표현하고 목에는 3개의 선으로 나타내는 삼도(三道)를 두 선으로 표현하였다. 옷은 양 어깨를 덮고 있으며 가슴은 일부 드러내고 속옷의 윗단만 경사지게 나타내었다.
양 손은 옷 속으로 숨겨서 표현하지 않았고, 발이 표현되지 않은 양 다리는 특이하게 가운데로 향하는 옷선 몇 개로 처리하였다. 아래쪽에 흐릿하게 표현된 연꽃대좌는 앞 바위의 윗면에 가리어 생략된 듯하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미륵곡 석조여래좌상(彌勒谷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6-2
이 불상은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신라시대 보리사(菩提寺)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있는 석불좌상이다.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대작이며,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다.l
연꽃팔각대좌 위에 앉아 있는 이 불상은 석가여래좌상이다. 반쯤 감은 눈으로 이 세상을 굽어보는 모습이라든가 풍만한 얼굴의 표정이 자비로우면서도 거룩하게 보인다. 별도로 마련된 광배에는 연꽃띠 바탕 사이사이에 작은 불상(化佛)을, 그 옆에 불꽃 무늬를 새겼다. 손 모양은 오른손은 무릎위에 올려 손끝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다.
특히 배 모양의 광배(舟形光背) 뒷면에는 모든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藥師如來)좌상이 선각되어 있는데,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다.
신라 헌강왕릉(新羅 憲康王陵)
사적 제187호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5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김정)을 모신 곳이다. 봉분 높이 4m, 지름15.8m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며, 봉분 하부에 4단의 둘레동을 돌렸다. 내부 구조는 연도가 석실의 동쪽 벽에 치우쳐 있으며,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m, 동서2.7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돌을 이용하여 상부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게 모서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m, 너비 128~96m이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이 있다.
헌강왕은 경문왕(景文王)의 태자로서 문치(文治)를 잘 하였으며, 이 시기에 처용무(處容舞)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993년 왕릉 내부가 조사되었다.
신라 정강왕릉(新羅 定康王陵)
사적 제186호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3
이 능은 경주 남산의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라 제50대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 김황)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4m, 지름 15m로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이다. 봉분 하단에는 둘레돌을 돌렸는데, 최하단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방형 깬돌(割石)을 2단으로 쌓았다. 바로 앞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다듬은 장방형 화강석으로 축조한 석단이 있다.
정강왕은 헌강왕(憲康王)의 아우로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慶州 南山里 三層石塔)
보물 제124호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227-2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두 탑이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높이는 동탑이 7.04m, 서탑이 5.85m로 차이가 있다.
동탑은 3층인데,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 양식으로, 바닥돌 위에 돌덩이 여덟 개로 어긋 물리게 기단을 쌓고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을 얹었다. 지붕돌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처마밑과 지붕 위의 받침이 각각 5단이다.
서탑은 이중(二重) 기단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쌓은 일반형이다. 윗기단의 몸체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돋을새김한 것이 독특하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傳 염불사지 삼층석탑
사적 제311호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30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수많은 불교유적이 계곡마다 조영된 경주남산은 신라인들의 역사와 문화ㆍ신앙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영산으로써 2000.12.2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남산 봉구곡 자락 남산동 1130번지 일원에 위치한 傳 염불사지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한 스님이 하루에 몇 번씩 시간을 정해 염불을 외우셨다. 법당에 앉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그 소리가 당시 서라벌 360방 17만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어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여 念佛師라 불렀는데 스님이 돌아가니 그의 초상을 흙으로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고쳐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너져 있던 傳 염불사지 석탑 2기의 탑재와 도지동 이거사지 삼층석탑의 1층 옥개석을 이용하여 1963년 불국동 구정광장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2008.1.24. 복원을 위하여 해체하였으며, 복원공사는 2007.6.13. 착공하여 2009.1.15까지 석탑 2기와 주변정비를 완료하였다.
서탑의 사리장엄구를 봉안하였던 사리공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2개이며, 3층 탑신의 방형사리공이 두공된 점 등으로 보아 최초 탑 건립시기를 7세기말 또는 8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慶州 南山 七佛庵 磨崖佛像群)
국보 제312호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36
이 불상들은 경주 남산 봉화골의 정상 가까이 위치한 마애 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로서 ‘칠불암 마애석불’이라 불린다.
삼존불의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이 심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사방불도 모두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따라 손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보살상(菩薩像)이 본존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게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慶州 南山 神仙庵 磨崖菩薩半跏像)
보물 제199호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6
이 불상은 칠불암(七佛庵) 위에 곧바로 선 절벽 면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 보살상(菩薩像)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臺座)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이다. 발은 연꽃 위에 있으며, 이처럼 유희좌(遊戱坐)*를 표현하였음은 드문 예이다. 그 아래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유희좌 : 결가부좌의 자세에서 한쪽다리를 풀어 대좌 밑으로 내린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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